의심하는 히스테리증 환자가 찾은 감춰진 진실
‘비밀은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리는 영화다. 장르적 규범에서나, 캐릭터의 역할, 스타일 모두 평범하지 않다. 선거 국면에 돌입한 집권여당의 유력후보의 아내이자 딸을 잃은 엄마 ‘연홍’ 역을 맡은 손예진은 드라마 ‘연애시대’ 이후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연애시대’에서 손예진이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면, ‘비밀은 없다’에선 영화가 그리는 세계와 충돌하며 그 세계의 공고함을 뒤흔든다. 배우로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는 경북의 유력 선거구에서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 김종찬(김주혁)의 아내 김연홍(손예진)이 남편의 선거운동 돌입과 함께 중학생 딸 민진(신지훈)의 실종을 맞이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평화롭고 모자랄 것 없어 보이던 가족의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누군가 딸을 납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연홍을 파국적인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힘이다. 예컨대 사태의 전말은 주인공과 관객 모두 예측하지 못했던 의외의 곳에서 밝혀지고, 정치 무대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인줄 알았던 영화는 구역질 나는 치정극이자 피눈물 나는 복수극으로 치닫는다.
‘비밀은 없다’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장르 문법을 어기고 관습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스릴러 영화가 지닌 남성중심적 서사를 벗어나는데, 보통 스릴러 영화 속 남성들이 장막과 함정이 거두어진 뒤 드러나는 중핵에 위치하는데 비해, ‘비밀은 없다’에서는 전말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거대한 음모의 배후로 ‘짜잔~’하고 등장할 것 같았던 자가 외곽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스펙타클한 ‘끝판왕’이 까발려질 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지저분한 추문과 소녀들의 은밀하고 슬픈 사랑이 드러난다. 확신을 갖고 “내 딸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증언은 모두 틀렸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밋밋한 것도 아니다.
충분히 충격적이고, 혹은 불편하다. 기존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던 남성일수록 더 불편할지도 모른다. 주체로서의 여성 통상 딸을 잃은 부모 중 아빠가 앞장서서 복수할 때, 엄마의 역할은 뒤에서 울부짖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 해결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부수적이거나 수동적 역할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은 없다’에는 전도유망하고 권력 있는 아빠가 존재함에도 사태의 전말에 대해 지극히 무심하거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을 촉발시키는 역할이나, 문제해결의 조력자, 반전을 선사하는 은밀한 협력자도, 문제해결의 주체도 모두 여성이다.
물론 이 여성들은 어딘가 기이한 면모가 있다. 대단히 히스테리컬하며, 저마다의 이유로 집요하다. 이 영화를 낯설고 불편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여기서도 기인한다. 극 초반 연홍은 우리가 정치 뉴스에서 보는 정치인 ‘아내’의 전형(상냥한 조력자)으로 등장했다가, 자신의 출신이 전라도라는 게 밝혀져 도시 안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딸 민진이 실종되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격렬하게 화를 내는가 하면, 자해를 하기도 하고, 심한 욕설을 내뱉거나, 밤새도록 수 만개의 이메일을 뒤지고, 집요하게 경찰서와 학교를 드나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여중생 역시 마찬가지인데, 학교에서 둘은 왕따이고, “이상한 음악”(인디밴드 무키무키만만수를 연상케 한다)을 하며, 어떤 면에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여성 캐릭터의 독특하고 다면적인 면모를 잘 살려냈다는 측면에서 여느 영화보다 성공적이다. 실종된 딸이 친구 미옥에게 했다는 말로 묘사되는 엄마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녀는 어릴 땐 연예인이 되고 싶었고, 커서는 “힐러리 같은 대통령 영부인”이 되는 게 꿈이었을 정도로 속물적이고 어딘가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지만, 딸은 그런 어리석고 음모 따윈 모르는 엄마가, 유일하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 불쌍한 어른이다.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기괴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이 남성 관객과 평론가들을 불편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북 신성구의 정치계에 연루된 남성들은 죄다 졸렬하고 이중적이거나, 타락하고 무지하며, 머릿속 한구석에는 저마다의 꿍꿍이가 있다.
이들은 전라도에 대한 정서적 폄훼를 여과 없이 내뱉으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무시하는, 가장 속물적이고 전근대적인 모습이다. 선거 게임에 사로잡힌 그들에겐 소녀의 실종조차 부수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연홍이 전라도 출신이었다는 게 대단한 ‘배신'인 것 마냥 빈정거릴 뿐이다. 그들에게 여성이란 그저 성적 대상, 기껏해야 자신들의 세계 바깥에서 들러리 노릇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요컨대 연홍은 의심의 여지없이, ‘의심하는 히스테리증 환자'다. 그녀는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붕괴하는 것만 같은 세계에서 연홍의 이런 집요한 태도(“생각하자, 생각하자…”)는 자신이 가늠할 수도 없었던 진실로 이끄는 힘이다.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죄다 졸렬하고 이중적이거나, 타락하고 무지하며, 머릿속 한구석엔 꿍꿍이가 있다. 이들은 전라도에 대한 정서적 폄훼를 여과없이 내뱉으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며 무시한다.
선거게임에 사로잡힌 그들에겐 소녀의실종조차 부수적 문제에지나지않는다. 오히려 연홍이 전라도 출신이었다는 게 대단한 ‘배신'인 것마냥 빈정거릴 뿐이다. 그들에게 여성이란 성적 대상, 기껏해야 남성-세계 바깥에서들러리노릇을하는존재일뿐이다.
남편은 어떤면에서 도착증자에 가깝다. 그는 유능한 남성-정치인으로서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면 뭐든 하려 한다. 보다 나은 쾌락을 위해서라면 부도덕한 선택도 서슴지 않으며,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행위는 조금도 원치 않는다. 섹스가 필요하다면 섹스를, 권력이 필요하다면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가장 그럴 듯한 길을 찾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 역시 “민중은 개 돼지”로 여기는 부류 중 하나일 게다. 하지만 히스테리증 환자 연홍은다르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쓰며 살아왔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다. 둘의 대립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전복적인 힘을 부여한다. ‘히스테리는 나의힘’?
‘비밀은 없다’는 자신만의 색깔, 자기만의 리듬을 감추지 않는 용감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격정과 결기가 머리속을 쾅쾅거리며 울린다. 그러나 이런 빼어난 면모들에도 불구하고 ‘비밀은 없다’는 흥행에 완전히 실패했다. 지지하고 격찬하는 견해 한편에서는 ‘개연성이 떨어지고 불편하다’는 혹평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길고 지루하거나 해서가 아닐 게다. 오히려 그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기괴해서일 게다. 이런 감상도 이해 못할만한 것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문법은 관객을 당황케 할 수 있다. 그러나 낯선 형식임에도 내용과 조화를 이루었고, 스스로 남다른 성취를 이루었기에 이 영화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주체성에 대한 비판을 형식과 캐릭터를 통해 날카롭게 표현한 작품이기에 더욱 그렇다.
다른 예술 작품들이나 미디어가 그렇듯, 영화 역시 습관이다. 똑같은 이야기, 고정화된 형식의 영화들만 접하다보면 천편일률적인 감정, 고정된 캐릭터들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MTV 개국 이후 영상 매체들의 문법이 바뀌었듯 말이다.
그러나 예술이 여전히 시스템에 전복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수용 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인식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새롭게 할 때다. 우리에겐 보다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장르, 폭넓은 실험과 도전을 마주치고 접할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전국 수천 개 상영관의 점령자 멀티플렉스들은 이런 용기 있는 영화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날카롭게 침입하는 영화들이 보다 길고 많은 도시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주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예술로서 ‘영화’의 존재 의의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들의 손익계산서에 더 다양하게 영화를 볼 권리를 빼앗긴 셈이다.
게다가 객석마다, 시간대마다 차등 요금제를 확대하는 멀티플렉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비밀은 없다’ 속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형상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어쩌면 ‘비밀은 없다’는 영화 바깥에서조차 적나라하게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집요함은 무엇일까?
이 글은 2016년 7월 11일 <민중의 소리>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http://www.vop.co.kr/A000010446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