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중국 신세대 농민공들의 삶과 고뇌
이 글은 중화권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 단전매(端傳媒, Initium Media)에 올라온 기사 「打工新生代:当下,只能在“不好”和“非常不好”之中做出选择」를 단전매 편집국과의 협의를 거쳐 번역한 것이다. 단전매는 현존하는 중화권 매체 중 가장 통찰력 있는 관점을 보여주는 언론 중 하나다.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는 단연 광둥성 선전시다. 이곳에는 해외 자본을 포함해 수많은 공장들이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중국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억압받는 계급이기도 하다. 본 글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선전에서 일하는 신세대 농민공(신노동자)들이 느끼는 억압과 고민,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원문 : 단전매 / 번역 : 김모두 / 사진 : 린쩐동
90년대생으로 선전의 공장에서 일하는 우동은 최근 일본 작가 야마다 무네키(山田宗树)의 소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다시 읽었다. “행복한 사람이 이 책을 보면 마음이 아플 거예요. 불행한 사람이 보면 재밌고 위안이 될 걸요. 나만 불행한 건 아니라는 거니까.” 그는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우동은 한 삼류대학에서 일본어과를 졸업한 후, 사회로 나왔다. 그는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동이 폭스콘 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할 땐, 저녁 7시에 일을 시작해 아침 7시까지 일했다. 이는 그가 졸업한 후 아홉 번째로 찾은 일자리였다. 그전에는 컴퓨터 수업을 신청해 서버관리를 배웠다. 광고를 보니 컴퓨터를 배우면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서였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쓸모가 없었죠.” 학비만 1만 위안이었다. 그는 신용카드로 학비를 지불했다. 두 번째 달에 카드빚이 나갈 때, 그는 다른 한 장의 신용카드를 통해 현금을 인출했다. 지금 그는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카드빚을 메워야하기 때문이다.
같은 90년대생인 여성노동자 샤오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국내 뉴스앱 ‘금일두조’에서 정치 논평 글을 읽는 걸 가장 좋아한다. 이 앱은 그녀의 나이, 성별, 직업, 지역 등 특징을 통해 그녀가 흥미를 가질만한 내용을 추천해준다. “노동자의 지위는 곧 이런 거예요. 계층은 이미 고착화됐죠.” 최근 샤오야는 신문에서 ‘계층 고착화’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접했다.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한다고 말하는 건 자기 위안일 뿐이에요.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정형화됐잖아요. 얼마만큼의 일을 하면 조금 좋은 대우를 받지만, 우리의 대체적인 운명은 바꿀 수 없죠. 품팔이 노동도 마찬가지고요.” 뚜렷한 비관이 샤오야의 삶을 관통하고 있었다.
스물네살의 노동자 여우여우는 공장에서 딱 한 번 연애를 해봤다. 나중에야 상대가 유부남이란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광동성 차오샨에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오빠들이 장가가서 아이를 낳는걸 도와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시집을 가야 했을 때, 집의 ‘착취’로부터 도망쳐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공장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매우 찾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더 많이 목격했던 것은 혼인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점이었다. 이미 결혼을 한 어느 여성 동료는 선전까지 아이를 데려와 일을 했다. 그녀는 매일 아이의 생활비 걱정을 하며 살아야 했다.
우동과 샤오야, 여우여우는 모두 90년대생이다. 이들은 교육받은 정도가 상대적으로 따져 높고, 자아인식이 더 강한 요즘 중국 청년들이다. 배부르고 따뜻한 삶은 이미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공장을 떠나는 것은 요즘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다. 하지만 반복해서 돌아오고, 결국엔 싫증이 나더라도 다시 기댈 수밖에 없다.
국가통계국의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 농민공 총량은 2017년에 2억8600만 명에 달했다. 그중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이 넘는다. 이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중화전국총공회의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윗세대 노동자들이 처음 사회로 나와 일을 시작한 평균 연령은 26살이다. 반면 80년대생의 경우는 18세다. 90년대생의 평균은 16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곧, 신세대 노동자의 성장 경험이 더욱 도시의 또래들과 같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은 경험이 없고,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공장으로 간다.
인구학자 위젠차오(于建嵘)가 2017년에 발표한 학술보고에 따르면, 신세대 노동자가 집을 나서 일을 시작하는 동기는 더 이상 ‘생존이성’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을 일종의 신분상승의 사회 경로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성공하겠다는 그들의 꿈은 부모세대에 비해 더 고집스러울뿐만 아니라, 노동 조건과 주거 조건의 쾌적한 정도, 일자리가 가져오는 사회 지위 등 역시 더 중시한다. 나아가, 차별이나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 그들은 보다 강렬하게 권리를 인식한다.
2018년에 중국 내지의 노동자운동은 거세게 일어났었다. 신세대 노동자 집단 역시 점차 역사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번 취재는 <단전매>가 막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3명의 90년대생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됐다.
샤오야는 폭스콘 선전공장에서 세 번째 퇴직을 했다.
그녀가 일하는 작업라인은 애플 스마트폰 중 한 부품의 생산을 책임진다. 레이저를 써서 가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 레이져광이 만약 눈에 닿기라도 한다면, 망막을 태워 상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방호안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샤오야는 공장이 제공하는 방호안경을 규정에 따라 정기적으로 씻는다. 어떤 안경은 이미 닳아 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망가진 방호안경은 다시 노동자들에게 전달된다.
일을 그만두기 전에 샤오야는 공장의 관리자에게 투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월초에 연가를 신청해서, 자신의 유급휴가를 만회했고, 그 후 폭스콘공회의 ‘사랑의 편지’ 78585에 전화를 해서 제보했다. 마모된 보호안경 외에도, 그녀는 안전검사부문이 승낙한 레이저 수당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도 투서를 썼고,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신변을 위협했던 문제에 대해서도 투서를 썼다.
투서를 보낸 다음날, 과장이 샤오야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투서를 철회하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무슨 문제가 뭐가 있겠어요?” 샤오야는 철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 후, 그녀는 이전의 동료에게 연락을 하자, 레이저 수당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노조의 ‘사랑의 전화’를 신뢰하지 않는다. 몇 달 전, 그녀는 익명 투서를 한 번 썼었다. 작업장 관리자가 노동자들에게 5분 더 일찍 출근해서 조회를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5분에는 임금도 쳐주지 않잖아요. 제가 왜 일찍 와서 조회를 해야 하죠?” 그것이 그녀가 처음으로 78585에 투서를 쓴 것이었다.
“익명으로 투서를 쓸 수 있을까요?” 샤오야가 전화를 걸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익명이었다. 얼마든지 승낙을 얻어 익명으로 쓸 수 있었다. 접수원은 전화 상에서 반복해서 샤오야의 사번을 물었다. 샤오야는 감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의 전화’의 운영 기제 때문에, 그리고 노동자로서 작업장에 대해 투서하는 것으로서, 작업라인 관리자에 대한 피드백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관리자는 모든 작업장의 노동자들을 불러 모아놓고는, 핫라인으로 투서한 사람이 나서서 일어나라고 요구했다.
샤오야는 ‘사랑의 전화’의 접수원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녀들은 보통 임신한 여성노동자들이었고, 힘든 작업을 맡을 수 없어서 전화 접수원에 안배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통상 직업적인 ‘사랑의 전화’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샤오야는 동료 리리가 공회에 가서 회의를 했던 경험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흉악해.” 한 번은, 리리가 일하는 라인의 조장이 휴가를 냈다. 그녀는 조장을 대신해 공회 년도 정기회의에 참석했다. 의견을 내는 일환에서 리리는 갑작스레 일을 열었다. 노동자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듯, 하루밤에 8위안 밖에 되지 않는 야간근무수당은 너무 적다는 생각을 말했다. “당신 누구야? 어느 부서에서 왔어?” 리리는 매서운 질문을 받았다.
샤오야는 일찍이 관리자의 사무실에서 폭스콘공회 선거 명단을 본 적 있다. 하지만 이 명단은 최종적으로 내려오지도 않았고, 그녀들에게 투표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올해 공회 선거에 대해선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어요.”
일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샤오야는 일찍이 라인장으로 발탁됐었다. 라인장은 관리층과 보통 노동자들 사이에 있는 자리로, 매월 500위안 이상의 수당을 받으며, 주요한 책임은 일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컨베이어벨트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당했다.
그녀는 폭스콘의 관리 제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층이 가능한한 노동자들을 쥐어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인장은 자주 “더 많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해야”되었다. 예를 들면, 휴가일을 바꿔버려서 노동자의 연장수당을 더 줄인다던지의 방법 말이다.
샤오야와 함께 라인장으로 발탁된 또 다른 남성 노동자가 있었다. “비록 능력은 별로였지만, 참 앞잡이 노릇을 잘 하고, 윗사람한테 아첨을 잘 하거든요.” 샤오야는 그를 싫어했다.
“저는 다른 사람 괴롭히는 사람 싫어요.” 지난 몇 년, 샤오야는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강좌에 참석해왔다. ‘공정’이나 ‘평등’, ‘존중’ 같은 관념들에 대해 논하는 행사들이었다.
공장이 일말의 인정미도 없는데다, 속물적이고,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작은 사회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된 후,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답을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기만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동료는 샤오야에게 너무 열심히 나쁜 소식을 알릴 필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샤오야는 그저 돈만 버는 것보다는, 인간됨의 ‘도리’를 더 신경 썼다. 그녀는 불평등을 싫어했고, 공정하게 대우받고 다른 사람 역시 공정하게 대우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열정의 대가는 샤오야가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게 했다. 폭스콘 공장 안에서 작은 리더로서 열심히 활동했고, 스스로 보다 나은 복리의 쟁취를 모색했다.
이번 퇴직으로 샤오야는 폭스콘 공장에서 세 번째로 떠나게 됐다. 1990년생인 그녀는, 8년 전 스무살이 됐을 때, 처음으로 폭스콘 공장에 들어왔다. 기계 조작을 배워야할 때, 먼지더미로 자욱한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규정에 따르면 작업장에서는 필터식 방독마스크이 지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여성노동자들은 내내 평범한 연탄마스크를 끼고 일을 해야 했다.
샤오야는 그녀의 일터를 “엿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정말 안 좋아요. 여성 차별도 심하죠.”라고 했다.
언젠가 작업장 관리자가 노동자들에게 생산량을 정해 지시한 적이 있었다. 생산량을 먼저 채우면 일찍 퇴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고, 연장근무 수당도 평소처럼 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샤오야와 동료들은 목숨 걸고 일을 했다. 하지만 다음 달이 되자, 생산량 지침 액수는 바로 올라가버렸다. 그렇게 되니 이 생산량을 위해 앞당겨 완성하는 것 말곤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함정에 빠진 거예요.” 샤오야는 기억을 떠올렸다.
방독마스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샤오야는 부서를 바꿔 다른 작업장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폭스콘 공장에서 라인을 바꾸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설령 원래 작업라인과 접수받은 작업장의 관리자가 모두 동의하더라도, 부서 변경에 성공하는데 까지는 어려움이 많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은 보통 퇴직을 한 후에 다시 폭스콘에 재입사하는 방법을 택한다. 샤오야도 세 번의 입사-퇴사를 반복했다. 이는 폭스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폭스콘을 떠나면, 샤오야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라인에서 조장을 맡고 싶지 않지만, 그저 한 사람의 노동자로 일해서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장은 계급분화가 엄격하기 때문에, 보통 노동자는 가장 큰 억압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샤오야는 특근으로 휴가일이 바뀌는 것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규정에 따르면 토요일 특근은 2배의 임금을 줘야 하는데, 이는 기본급으로 2650위안 정도만 받는 노동자들로서는 중요한 수입원이다. 하지만 폭스콘은 춘절(설날)에 수주가 감소했을 때 노동자들에게 15일 정도의 휴일을 주었다. 이는 법률에서 정한 7일의 휴가를 초과하는데, 이는 춘절 연휴 전 토요일 특근과 바꾼 것이다. 이렇게 휴가일을 바꿔버리면, 폭스콘은 이 특근에 대해 본래 특근 수당인 2배 상당의 수당이 아니라, 기본급 상당의 임금만 줘도 되게 된다.
“궈샤오링(폭스콘의 창업주)은 항상 폭스콘 노동자들은 잔업을 좋아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는 우리가 잔업을 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가 없다는 점은 말하지 않았어요.” 샤오야는 이런 변명에 대해 비웃었다.
경제 상황 역시 노동자들의 수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0년 3월 샤오야가 처음 폭스콘에 들어갔을 때, 기본급은 900위안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 후 몇 개월마다 한 번씩 임금이 올랐고, 2011년 4월에 이르자 임금은 2300위안까지 올라있었다. 이는 폭스콘의 복리가 가장 좋았던 시절로, 노동자들에게 무료 기숙사와 식비까지 제공됐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르러 경제 상황이 나뻐지자, 기본임금은 7년 전에 비해 350위안만이 올랐을 뿐이다. 물가는 이미 몇 배가 올랐는지 모른다. 이제 단지 성중촌에서 단칸방 하나를 빌리는 것만으로도 임금의 반을 써야 한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폭스콘은 베트남에 공장 건설을 투자하고 있다. 끊임없이 오르는 중국에서의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한 것이다.
샤오야는 불경기의 조건에서는 다른 공장들 역시 더 낫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그녀는 두 번에 걸쳐 폭스콘을 그만두고 다른 공장에 갔었다. 하지만 그곳의 폭리가 더 나빴고 착취 정도는 더 심했기 때문에 폭스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쁨’과 ‘매우나쁨’ 사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녀는 별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사실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셈이에요.”
2014년, 우동은 삼류대학 일본어 전공을 졸업했다. 그는 후난에서 기차를 타고 동관으로 왔고, 타이완 기업에서 일을 했다. 맡은 일은 일본 고객의 우편물에 회신하고, 주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1달 넘게 일하고 우동은 일을 그만뒀다.
우동은 타이완 상사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제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는 배짱이 없었어요.” 상사는 항상 그가 일하는 걸 쳐다봤다. 예컨대 한 번 잘못하게 되면 지장에 무조건 ‘틀렸음’ 도장을 찍었고, 엄청 사나운 태도로 그를 비난했다. 이렇게 힐난을 들으면, 우동은 바로 긴장했고, 실수는 더 빈번해졌다.
“이건 제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우동은 덧붙여 말했다.
타이완 기업을 그만 둔 후, 우동은 다른 한 공장에 가서 창고관리 일을 했다. 지게차를 운전해서 화물을 날라야 하는 일이었다. 3,4개월 후, 우동은 다시 일을 그만뒀다. 인간관계에서 생긴 어려움 때문이었다. 우동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일하다 짬이 생겨 상사와 동료들이 담배를 피우러 가면, 그는 따라간 적이 없었다. 피차간 어떤 교류도 없었고, 관계는 냉담해졌다. 나중에, 자신의 일 능력 때문에, 우동은 상사와 충돌이 생겼다. “전 지게차 운전은 괜찮게 잘 했었어요. 하지만 상사는 제가 못한다고 생각했죠.”
다시 일을 그만 둔 후, 우동은 동관을 떠나 선전 롱화구에 와서 친구를 찾았다. 그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새로운 지역에 올 때마다 그곳의 도서관으로 향한다. 롱화의 도서관에서 우동은 음악 교육을 무료로 진행하는 사회단체를 발견했다. 그는 기타반에 등록해 한편으론 기타를 연습하고, 다른 한편으론 인력시장에 가서 일을 찾았다. 이번에는 좀 가벼운 일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일은 롱화에서 160km 떨어진 샨웨이시의 한 공장의 산업엔지니어 자리였다. 주로 공장의 생산효율을 높이는 걸 책임지는 일이었다. 듣기 좋은 직함이었고, 일 내용도 비교적 중요한 것이었다. 작업장에서의 배치부터, 공장 컨베이어벨트 설계, 그리고 노동시간 계측까지, 그의 의견은 사장의 중시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높지 않아서 3000위안 조금 넘는 정도였다. 출근 시간이 되면 반드시 작업장 안에서 방진복을 입고 있어야 했고, 모든 사람들이 포장된 채 일어나 있어야 했다. 우동은 억압적이라고 느껴 다시 일을 그만뒀다. 이번 일은 가장 오랫동안 일한 것이었는데, 반년이었다.
롱화에 돌아온 후, 우동은 곧바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동은 쑥스러워 했다. 당시 마사지샵에서 손님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는, “주된 이유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고 싶어서였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그가 일자리를 바꾸는 중요한 요소다.
다음 일자리는 부동산 중개였다. 그는 그 일이 비록 그에게 돈벌이가 되진 못했을지언정, 최소한 그가 무언가 공부할 수 있도록 했고, 사회에 대해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우동은 낯선 사람과 사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 일을 하면, 날이면 날마다 고객에게 전화해 부동산을 팔아야 한다. 더구나 일자릴 구할 때 법정 최저임금의 기본급을 약속받았었지만, 막상 출근하니 완전한 성과급제로 바뀌어 있었다. 이 일이 싫어질 수밖에 없었다. 낯짝 두껍게 낯선 사람을 만나 몇 백만 위안짜리 집을 팔아야 했지만, 대다수 고객들은 성가셔하며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우동의 자신감은 점점 마모되었고, 퇴폐해져갔다.
우동은 공장 일도 싫다. 작년에는 폭스콘에서 파견직으로 일했었는데, 1시간에 15위안을 주는 조립라인에서 일했었다. 만약 한 달에 지각이나 조퇴가 없다면, 1시간에 17위안을 계산해주는 일자리였다. 일을 막 시작했을 땐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생산량 목표가 점차 늘어나자 노동자들은 가장 극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들은 결코 단결하지도 않는다. 같은 조립라인에서도 느리게 작업하는 노동자는 더 빨리 작업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다그쳐진다. “만약 사람들이 좀 더 단결했더라면, 그렇게 빨리 일할 필요가 없으니 느슨해지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지도 않겠죠.” 그는 공장이 너무 억압적이라고 생각했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이 모두 이런 억압에 익숙해져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저는 억압에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 그만 두는 거죠.” 어쩌면 우동이 퇴사를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건 무감각에 대한 저항이자, 억압받아 동질화된 도구가 되는 것에서 모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흥미가 많아요.” 우동은 자신과 사람들이 다른 점이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할 때 그는 일본 작가의 소설을 좋아했고, 평소엔 음악하는 걸 좋아하는 문예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사회에도 관심이 많았다. 펑여우촨(위챗 타임라인)에 추이융위안의 행동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올리거나, 선전판 ‘페이칭’(폐청) “삼종대신”의 생존 상황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부동산 중개일을 그만 둔 후, 우동은 롱강으로 이사와 월세 1천 위안 짜리 방을 빌렸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스마트폰으로 장기를 두면서 3개월을 보냈다. 점심과 저녁식사를 하러 아래층에 가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다른 소비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 달에 1600위안 정도면 충분했다.
“장기는 제가 걱정을 잊는 방식이에요.” 그것은 우동이 보낸 가장 즐거운 나날이었고, 장기 실력도 가장 좋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는 인력시장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금방 셋방으로 돌아와 잠을 자거나 장기를 두기 일쑤였다.
지출이 많진 않았지만 우동은 빚이 있었다. 그는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었는데, 간판 일을 배워 나중에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를 찾고 싶었다. 그는 신용카드로 1만 위안의 학비를 지불했고, 다른 신용카드로 채무를 메우고 있었다. 4~5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었는데, 이런 돌려막기로 잠시 동안 채무 문제를 방치할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의 궁핍한 상황을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들은 하나같이 저축한 돈도 없었다.
또 한 번은 음악을 배울 때 알았던 친구가 우동에게 알바 하나를 소개시켜준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장기를 가르쳐주는 일이었다. 이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사구에 있는 공공서비스센터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우동이 가장 좋아했던 이 두 아르바이트는 설령 임금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45분 짜리 수업마다 120위안) “노동자”가 아니라, “선생님”이란 걸 하는 것이어서 좋았다. 이 칭호는 그를 기분 좋게 했다. 그는 자신이 문화인으로 여겨지는 걸 보다 동일시하게 됐다. 하지만 이 두 알바가 끝난 후, 다시 그를 부르는 곳은 없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장기 수업을 했을 때의 문제를 반성했다. 그는 프로기사도 아니었고, 기초지식이 충분히 견실하지도 않았다. 일본어 수업에서도 어떤 수강생들은 그가 잘 가르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달, 우동은 공장에서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야간 일을 했다. 주로 기계의 계수를 검사하는 일이었다. 그는 돈과 신용카드가 필요했다.
이 일은 밤낮이 뒤바뀐 것 이외에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동은 그렇게 오래 일할 순 없었다. 그는 공장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를 흥미진진하게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취미였다. 일하지 않는 날에 우동은 항상 사구의 취미반에 참가했다. 그는 지금 희극 연기를 배우고 있는데, 글쓰기를 시작할 계획도 있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한다.
여우여우는 선전으로 도망쳐왔다. 일은 그녀에게 자유를 줬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자유에서 도망치고 있다.
1994년에 태어난 여우여우는 올해 24살이다. 그녀는 엄마와 막 전화 통화를 마친 후, 조금 낙담했다. “집엔 돈이 없어. 니 아빤 몸도 좋지 않고.” 엄마는 항상 집안의 상황이 나쁘다는 걸 그녀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녀가 집에 돈을 부쳐주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여우여우는 매달 1천 위안 정도의 돈을 집에 부친다. 중학교 졸업 후 막 일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돈 쓰는 법을 배우지 못 했다. 매달 필요한 아주 조금의 용돈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부모님께 부쳐드렸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부쳐도 항상 “부족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여우여우는 광동성 차오산지구에서 태어나 자랐고, 세 명의 오빠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녀와 언니들은 모두 돈을 벌어야 했다. 오빠들이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리는 걸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땐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우여우는 말했다. 언니들은 10대 때 이미 일을 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어 남동생들의 학비를 대줬다. 여우여우의 언니들은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고, 큰오빠가 대학을 다니는 도중에도 그랬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좋은 일자리를 찾진 못 했다.”
여우여우는 한 번 아빠와 말다툼을 해 가출을 했었다. 당시 그녀는 오빠의 식당에서 카운터 일을 봤다. “월급도 안 주더라고요.” 하지만 아빠는 그녀의 일하는 방식을 꼴 보기 싫어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했다. 결국 여우여우는 홧김에 춘절 연휴 전에 짐을 싸서 선전으로 왔다.
가족은 여우여우에게 억압이었다. 성별 고정관념이 심한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저는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오히려 엄마 아빠의 관심은 전혀 받지 못했어요. 부모님은 저같은 애를 낳은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이에 비해 오빠들은 수월하게 가정 생활의 무게중심이 되었다.
언니들은 잇따라 결혼해 집을 떠났다. 다시는 집의 경제적 구멍을 메워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전히 차오산에는 여자들은 남편의 집에 살아야 한다는 문화가 남아있다. 그 때문에 결혼 전까지 부모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여우여우는 여가시간을 활용해 여성노동자지원 사회단체 활동에 참가했었고, 여전히 그단체의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다. 성불평등에 대해 그녀는 “모든 사람이 이걸 알아야 한”다고 여긴다. 남자들의 차별적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정당하고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에게 말한다. “니 이 말은 여성을 차별하는 거야.”, “그건 성폭력적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인간관계가 유달리 경직돼 있는 건 아니다.
여우여우는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연애를 딱 한 번 해봤다.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후 상대가 유부남이란 걸 알았다. 슬프지만 깨달았다. “공장 안에선 정말 얼마 안 되는 진정한 연애가 있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왔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설령 결혼을 하더라도, 고통스러움도 많은 행복이겠죠. 그녀와 알고 지내는 한 결혼한 동료는 아이를 업고 선전에 와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삶은 너무도 힘들었다. 매일 아이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정의한다. 두 사람이 함께 친구처럼 대화하고, 가족처럼 서로 돕는 관계라고.
그래서 일은 그녀가 스스로 가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됐다. 일은 그녀에게 자유를 줬고, 가정의 시야 밖에 두게 했으며, 번 돈을 스스로 쓸 수 있게 해주었다. 반드시 모든 돈을 상납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사면 되지, 오빠들이 입던 옷을 입을 필요도 없어졌다. 주말에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예전처럼 집안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자유는 참 심플하다. “이왕 (우리 가족을) 바꿀 순 없게 된 이상,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죠. 엄마아빠는 저를 이렇게 키워주기도 했으니까요….” 가족으로부터 억압받아온 여우여우의 입장에서 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먼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니 말이다. 일은 그녀에게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줬지만, 그녀에게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사는 게 좀 더 쾌적해졌다는 점 뿐이다.
억압이 별 건가. 자유 역시 별 게 아니다. 그녀는 인생에는 그리 중요한 일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회단체에서 교육을 받던 중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들었었다. “저는 공장에 있잖아요. 공장은 사람을 억압하는 곳이에요. 사람은 착취당해선 안 되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녀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오히려 ‘부담’이었다. 여우여우는 자신이 현 상황을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삶에서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볼 것을 썼지만, 노동자들은 그걸 볼 수 없어요. 하지만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나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겠죠.”
공장을 떠난지 이미 두 달이 넘었다. 지금은 여성노동자지원 사회단체에 실습생으로 일하고 있다. 위챗 계정에 올리는 글의 편집을 맡았다. 매번 주제를 정할 때, 상사들은 그녀에게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생각하는 건 너무 피곤해요.”
공장에서 회의를 할 땐 그저 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뇌를 굴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조립라인에서 일할 때에도 꾀를 부려 멍하니 있는 방법이 있었다. 편집 일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민하는 게 싫다고 한다.
그녀는 유치원 보육교사를 하고 싶고, 어린이들을 돕고 싶다. “훨씬 간단하지 않을까요. 꼬마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되고, 인간관계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잖아요.”
서른살이 되면 집에 돌아가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돌아가지 못하면 그냥 갈만한 농촌 아무데나 찾으면 되죠.”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샤오야, 우동, 여우여우 세 명의 이름은 모두 가명 처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