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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an 14. 2019

윈난에서 가장 붐비는 여행지, 리장고성과 다리고성

중국의 고성과 고진, 그리고 역참

다리고성(大理古城)이 좋을까, 리장고성(丽江古城)이 좋을까? 지난여름 윈난 여행을 가기 전 고민했던 문제다. 두 곳이 비슷한다는 얘기를 종종 봐서 한 군데만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이런 고민은 답이 없다. 불가능하지만 않다면 둘 다 가는 게 나은 것 같다.


결과부터 말하면, 다리와 리장이 그렇게 비슷한 건 아니었다. 거주하는 소수민족이 달라 문화도 다르고, 지형과 모양도 다르다. 역사적 내력이 갖고 있는 '급'도 다르다. 다리는 나름 300년 간 지속된 왕국의 수도였고, 리장은 나시족의 중심 도시긴 했지만 왕국은 아니었다.


지난여름 윈난 여행을 다닐 때 두 곳에 각각 2박3일과 3박4일 머물렀었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동안 두 곳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힘들다. 여행으로선 둘 다 만족스러웠는데, 관광객이 상당히 많긴 했다. 악몽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가 중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많았다. 중국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다리고성은 옛날 남조(南朝)와 대리국(大理国)의 왕도였다. 남조는 서기 738년 당나라 황제의 지지 하에 현 윈난성 지역에 세워진 작은 왕국이었다. 164년 간 지속되다가 망했다. 937년, 남조를 이어 건국돼 약 300여년간 지속된 왕조가 대리국이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가 대리석을 "대리석"이라 부르는 이유도 당시 대리국 특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의 다리고성은 대리바이족자치주의 중간 쯤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자치주에 소수민족 바이족이 많이 살아 바이족자치주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전체 인구의 3분의1 정도이고 나머진 한족이다. 고성은 얼하이(洱海)라 불리는 엄청나게 거대한 호수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으로는 이 호수를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창산(苍山)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지고 있다.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올라가기 때문에 동쪽으로 90도를 돌린 배산임수 지형이란 느낌이 든다.


다리로 가는 길의 난이도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쿤밍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을 간 후, 다리역에 내려 택시나 버스를 타면 된다. 사실 나도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기차표 예매할 때 여권번호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기차를 타지 못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멘붕에 빠졌다가 미등록택시 호객꾼을 만났다. 그는 우릴 오타바이를 태워 어딘가 음침한 골목으로 데려갔다. 어딜 데려가는거지? 그땐 정말 납치하는 걸까 걱정돼 엄청 쫄았었다. 가격은 인당 150위안이었는데 기차삯이랑 똑같았지만 뒷자리에 4명을 태워 6시간을 달렸다.


다리고성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어두운 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끼어 가다보니 정말 괴로웠다. 다리에 도착해 시내에 내리니 어느덧 밤 11시. 어김없이 디디를 불러야 했다. 다리 시내는 고성과 차로 45분 쯤 떨어진 곳으로 얼하이 남쪽에 있다. 다리역 광장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


다리고성에서의 2박3일은 내내 이리저리 구경만 하는 시간이었다. 다리고성은 왕도로 설계됐기 때문에 모든 길이 사방 직선 형태로 나있다. 그래서 어딘가 찾아가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다. 하지만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만만하게 봐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성'의 이미지로는 경복궁정도의 면적을 생각하기 쉽지만 다리고성은 그런 정도를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넓다. 그래서 꼭 가오더디투(高德地图)이나 텅쉰디투(腾讯地图) 같은 지도 APP을 보며 돌아다녀야 한다.



날씨가 맑을 때, 혹은 높은 산등성이에 구름이 끼었을 때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저 높은 산도 코스가 있긴 한데, 비가 너무 자주 와서 가보진 못 했다. 원래 6~8월 윈난은 우기이기 때문에 비가 거의 이틀에 한 번 이상 온다. 다리고성 어디에 있으나 저 산이 보인다.


얼하이 호수도 정말 아름답다. 귀(耳) 모양으로 생긴, 바다(海)처럼 넓은 호수라서 '얼하이'라고 지은 것 같다. 지도를 보면 호수가 귀 모양이란 걸 알 수 있다. 호수 건너편의 작은 마을들이 보이는 풍경이 동화 속 세상에 온 것만 같다. 얼하이변에 가려면 고성에서 나가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보통 이곳에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는 고성 안의 오토바이 대여 서비스를 통해 전기 오토바이를 빌려 돌아다니는 것이다. 고성 외곽 쪽에 몇 군데 있는데 가격대는 조금씩 다르다.


바이족(白族)은 말 그대로 흰색을 좋아한다. 옷도 흰색, 건물도 흰색 위주다. 다리고성은 이런 전통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성 안의 중심 공간은 바이족 컨셉을 유지하고 있다. 다리고성 안의 주요 지점은 언제나 관광객이 많다. 한적한 곳을 찾으려면 북쪽 골목으로 가면 된다. 이쪽엔 실제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많이 모여있고, 골목도 조용하다. 그리고 예쁜 카페나 서점도 종종 보인다. 이쪽엔 민박집들도 많은데,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을 위주로 하는곳들이라서 에어비엔비에 등록된 곳은 별로 없다.



다리를 떠나 리장으로 갈 땐 기차를 타는 게 가장 좋다. 2시간 정도면 되는데 가는 길의 차창 밖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잃게 한다. 리장역에 내리면 사람들이 무지무지 많다. 그 인파를 뚫고 버스를 탔는데, 거의 한 시간을 가야 리장고성 앞에 다다를 수 있다.


사실 리장고성은 다리고성에 비해 한국에 훨씬 많이 알려져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몇 차례 등장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신서유기2'의 주요 공간이었다. 내가 윈난 여행을 오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도 이곳 리장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리장고성 전경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어떻게 세상에 저런 거대한 전통 도시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꼭 오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소문대로 멋지고 상상대로 아름다웠다. 규모는 생각보다 더 컸다. 다리고성과 다른 점은 이곳은 온통 복잡하고 불규칙한 형태의 골목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왕국의 수도가 아니라 나시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오래 전부터 모여 살면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 것 같다.


복잡하고 불규칙한 골목길을 따라 고성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올라가면 이곳의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리장고성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은 죄다 이 언덕 위에서 찍은 것들이다. 날씨가 좋을 때 좋은 스팟에 가서 앉아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런 곳일수록 음료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싼 카페인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관광지 카페는 보통 노래하는 가수가 있는데 듣기 좋을 때도 있지만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서 조용한 카페를 찾는 사람들에겐 별로 좋지 않다. 처음 갔던 곳에선 망고쥬스를 시켰는데 한 잔에 48위안(약 8천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는데, 심지어 기분 나쁠 정도로 맛도 없었다. 그런 곳은 가능하면 가지 않는 게 좋다.



고생 끝에 찾은 'No.1 coffee'라는 2층 짜리 카페가 있는데 이곳이 입지나 가격, 전망 등을 모두 따졌을 때 가장 좋았다. 가수도 없었고,(가수 분들께 죄송) 조용한데다, 커피도 그냥 스타벅스보다 조금 싼 정도의 가격이었다. 게다가 이 카페 옥상엔 리장고성의 풍경이 한 눈에 보이는 멋진 전망대가 있다. 3박4일 동안 세 번이나 이 카페를 찾은 이유다. 해질녘 이 옥상에 앉아 고성 전체를 보고 있으면 이 시간이 영원이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나시족은 동파 문화로 알려진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도 얼마 안 되는, 고유의 글자를 갖고 있는데, 19세기 중반 쯤에 어떤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리장고성 바깥에 동파문화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에 가면 동파문화에 대한 다양한 소개가 있다. 리장고성 곳곳에도 동파 문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굉장히 귀여운 상형문자다. 활은 그냥 활로 그리고 새는 그냥 새로 그린다.


인간적으로 글자가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실은 '글자'라기보다는 거의 '그림'에 가깝다. 신기하게도 계속 쳐다보게 하는 매력이 있는데, 일단 귀엽고, 뭔가 의미를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골목을 돌아다니다 글자를 마주치면 죄다 찍었는데 그래서 쓸데 없이 동파문자 사진이 너무 많이 남았다.


나시족의 귀여움은 글자만이 아니다. 전통 춤마저 귀엽다. 거미줄처럼 얼키고설킨 리장고성의 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한복판에 큰 광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매일 오후 3시에 전통 춤 공연이 펼쳐진다. 어쩌면 매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자세한 시간은 누군가 여행 안내서에 자세히 써놨을 것이다. 난 거의 사전 정보 없이 갔기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이 춤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시족 전통복을 입은 주민들이 나와서 강강술래처럼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는데 속도는 훨씬 느리고 동작은 소꿉장난같다. 처음에는 나시족 위주로 추다가 나중엔 관광객들도 함께 따라서 출 수 있다.


천천히. 엉거주춤, 빙글빙글


리장고성의 골목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규칙하냐면 대충 지도 한 번 보면 쉽게 길을 찾는 내게도 난이도가 높았다. 어딜 가도 건물들의 형태가 비슷하고 죄다 전통 기와 건물이라서 구분할 수 있는 스팟을 찾기도 어렵다. 몇 번이나 같은 길을 왔다갔다 하며 헤맸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이곳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난 원래 무작정 골목길을 걷는 걸 좋아했다. 미로처럼 얽킨 골목을 목적지 없이 걷다보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뇌가 평소에 갖던 생각의 영역을 완전히 다른 곳까지 확장시켜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과거에 대한 생각, 현재의 고민도 더 풍부해진다. 헤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나 사건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때론 그런 우발적 상황이 가만히 앉아 쥐어짜내는 내 상상력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리장고성의 단점은 관광객이 너무 많고 사람이 적은 시간대가 아주 적다는 점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이어야 그나마 여유롭게 걸을 수 있고, 한낮에나 저녁 땐 그러기 힘들다. 워낙 유명한 고성 관광지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리장고성이 다리고성이 좀 더 만족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음식도 리장의 유명한 음식점들이 보다 나았다. 비교적 더 깔끔하고, 받아들이기 쉬웠다. 반면 따중디엔핑(大众点评)이라는 APP을 통해 찾은 다리에서 젤 인기있는 식당은 우리에겐 맞지 않았다. 리장에서의 첫날 밤 갔던 식당은 윈난요리를 파는 곳이었는데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동파육과 미씨엔(米线; 쌀로 만든 윈난면요리)이 특히 맛있었다. 여기서 샹그릴라 맥주를 처음 접했는데 여행객들에겐 유명한 이 동네 맥주라고 한다. 나쁘지 않았다.



리장고성 근처에는 옥룡설산이 있고, 그밖에 공원이나 고진 등도 있다. 쑤허고진이라는 바이족 마을인데, 1인당 40위안의 입장료를 받는다. (반면 리장고성이나 다리고성은 입장료가 없다.) 물론 난 학생 할인을 받아 20위안에 들어갔는데 괜찮은 옛마을이긴 했지만 굳이 시간 오래 들여 갈만한 곳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다신 쑤허고진은 옥룡설산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날씨가 맑으면 경치가 끝내주게 좋다. 리장고성이랑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갈 땐 버스를 타고 갔지만 돌아올 땐 택시를 잡아탔다.


뭔가 아쉬워서 택시 기사님(여성 분이었다)께 이 동네 괜찮은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물었더니 리장고성 바로 북쪽에 있는 헤이롱탄공원(黑龙潭公园)을 소개시켜주셨다. 사전엔 AAA급이라고 나와있지만 사실 AAAA급 경구다. 원래 "潭"은 깊은 못이란 뜻인데, 못 수준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호수다. 1시간 넘게 걸어도 한 바퀴를 다 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 자체가 맑고, 이 호수 뒤로 옥룡설사이 있어서 호수 위로 설산이 비췬다. 그래서 위췐공원(玉泉公园)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공원 중간 쯤 나오는 길엔 동파문화박물관이 있다. 심심해서 들어가봤는데 여긴 꼭 가보는 게 좋다. 동파문화의 역사에 대해 꽤 자세하게 전시해두었고, 몰랐던 사실도 많이 담겨 있다. 동파문화가 이렇게 독특하고 많은 연구와 발굴이 이뤄진 거였는지 몰랐는데 인상적이었다. 1천 년 전에 만들어진 동파문자가 이렇게 남겨질 수 있었던 건 2만 권에 이르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런 게 있었고, 비석 같은 것도 남아 있었다. 나시족의 토테미즘적 종교인 동파교의 교리를 기록하기 위해 쓰인 문자였는데 1960년대에는 사용이 금지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동파문자 교육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에 신문과 서적 발간까지 있었다고. 박물관 전시물 중 중국 혁명 직후 만들어진 플래카드가 전시돼 있었다. 여기엔 한자만이 아니라, 만주어 등 소수민족 글자도 함께 적혀있었는데 동파문자도 적혀 있었다.



사실 리장에 오면 옥룡설산을 빼놓을 순 없다. 꼭 가야 한다. 하지만 난 못 갔다. 동행자가 가기 싫다고 한데다, 나도 그렇게 엄청나게 가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윈난은 나중에 언제든 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부모님이 청두로 오시기 전에 나 혼자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돈이 조금 모자랄 것 같은 점도 부담이었다. 다음에 오면 옥룡설산과 샹그릴라에 꼭 오리라. 물론 그땐 리장고성의 좋은 호텔도 잡고. 이번 숙소는 너무 저렴해서 그런지 별로였다.



두 고성과 쑤허고진 말고도 여러 고성과 고진을 갔었다. 고성이란 건 말 그대로 성이다. 기본적으로 성이 둘러싸고 있는 옛 도시를 일컫는다. 고대 왕국의 왕도였거나, 혹은 지방의 꽤 큰 거점 도시였던 경우 고성으로 불린다. 역사적으로 국경도시였던 곳이면 분명 요새로서의 발전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변경에 고성이 많은 것 같다. 고진은 말 그대로 '오래된 마을'이다. 비교적 길게는 1천년 전, 짧게는 200년 전의 모습이 유지되는 마을들 중에서 개발을 통해서 관광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예전에 중국은 이런 개발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 개혁개방을 시작하고, 관광산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면서 고성 혹은 고진 개발이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가끔은 고성과 고진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예를 들어 구이저우성 구이양시(贵阳市) 남쪽에 있는 칭옌고진(青岩古镇)의 경우 규모도 크고, 보존 정도도 좋은데다, 그 외곽을 성이 둘러싸고 있기도 하다. 이건 고성인가 고진인가. 여기선 고진이라고 부르는데 그 정확한 차이를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전쟁이 잦은 요충지였기 때문에 성벽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강을 낀 변에서부터 시작해 산 위쪽까지 성벽이 이어져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사진만 보면 "이거 만리장성이잖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진보다 더 낮은 급의 옛 마을이 있다. 바로 역(驿)이다. 역이란 건 옛날에 파발, 즉 소식을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거나 사신 등을 맞이하는, 뭐 그런 걸 할 때 말을 갈아타는 곳인데, 국경엔 워낙 오랑캐가 많으니까 엄청난 성까지 쌓은 경우가 있다. 내가 가 본 유일한 역은 지밍역(鸡鸣驿)이었는데, 지밍역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鸡鸣이란 건 닭이 운다는 뜻이다. 닭이 우는 역참.


지밍역은 허베이성 화이라이현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때인 15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역참을 두른 성 안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엄청 낙후해서 고작 300명 정도 산다. 면적은 22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그 넓은 마을을 거대한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면 한국에도 없는 고성이라 할 수 있다. 대륙에선 '역참'도 이 정도라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성벽 길이만 1891.8미터에 달하니, 대략 473미터씩 사방을 둘러싼 규모다. 성벽의 표층엔 벽돌을 쌓았고, 그 안은 진흙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성벽 두께만 8~11미터이고, 높이는 3~5미터다.



지밍역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성문 안으로 아주 썰렁한 거대한 마을이 나타난다. 말 그대로 시골 마을이다. 인기척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어떤 집에는 예전 살던 사람이 쫓겨났었는지 관료들을 규탄하는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관광객도 없고, 보이는 주민도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한 주민에게 물었다. 여기 몇 명이나 사나요? 300명 쯤 산다고 했다. 그 정도 면적이면 족히 3천 명은 살만 했지만 다들 도시로 떠나고 없는 것 같았다. 중국의 농촌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다. 이렇게 거대한 유적을 갖고도 고향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구나. 하긴... 유적이 너무 많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오래된 역참이나 마을이 리장고성이나 다리고성처럼 고도로 관광화된 곳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곳은 찾아가기도 어렵고, 주위에 투숙할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런 곳의 매력을 발견하는 거야말로 여행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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