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청두, 쿤밍의 유명 서점들
어릴 때부터 서점 가는 걸 좋아했다. 집 근처엔 교보문고가 있어서 주말에 심심하면 놀러가 몇 시간씩 죽치고 있었다. 책을 사지 않아도 이것저것 뒤적이기도 하고, 가끔 좋은 책을 찾으면 앉아서 읽기도 했다. 서점은 나를 재촉하고 보채는 공간이기도 했고, 안정감을 주기도 했으며, 때로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혹은, 데이트 장소인 적도 많다. 서촌에 살 땐 창성동에 있는 가가린에 종종 가기도 했다. 불행히도 지금은 없어졌다.
요즘 한국은 독립서점, 작은서점이 꽤 핫한 문화가 됐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전국 곳곳에 작은 독립서점들이 하나둘씩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다. 물론 내 생각에 요즘 쓰는 '독립서점'의 '독립' 개념은 과거에 부여했던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종속적이라고 할 순 없지 않나. 그렇게 해서라도 서점을 찾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게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독립서점 해쉬태그를 팔로우하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서점들의 소식이 올라오는 게 놀랍다. 어떤 서점 계정은 팔로우하기도 하는데 부산에 있다는 손목서가 같은 곳은 컨셉을 확실히 잡은 것 같았다. 사진을 보면 서점에서 보이는 바다도 너무 멋지고, 서점 안도 꽤 잘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책과 서점에 대한 주인의 태도가 보인다는 점도 이곳이 인기를 끄는 이유인 것 같다.
듣기로 이런 작은 서점문화는 일본에서 온 것이다. 사실 일본엔 한 번 밖에 가보지 못했고, 그때도 10박11일 동안 공연을 했었기 때문에 여행 다닐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풍문으로만 알고 있는데, 일본의 서점 문화가 한국에 전파되고 그게 요즘의 한국에서 꽤 유행을 끈다는 건 좋은 것 같다. 나도 어릴 때부터 서점이나 작은 영화관을 여는 게 꿈이었는데, 언젠가 그런 걸 할 수 있는 날이 오려나?
중국에도 일종의 서점 문화가 있다. 한데 한국과 같은 독립서점은 거의 보이지 않고, 꽤 많이 알려진 서점이나, 유명한 체인 서점들이 곳곳에 있다. 물론 이런 문화도 도시마다 성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베이징은 대형 서점 브랜드 몇 개가 시내에 몇 개씩 있고, 그런 곳들이 가장 핫하기도 하다. PAGE ONE, 三联书店(싼리엔서점), 单向空间(단향공간), 西西弗书店(시시프스서점), 中信书店(쫑신서점) 등이 그것이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브랜드 서점이긴 하지만 각각 조금씩 분위기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좀 다르다.
PAGE ONE은 베이징에 세 군데가 있는데 그 중 전문대가에 있는 게 제일 유명하고 크다. 산리툰점도 큰 편이지만, 전문대가점에 비하면 비할바가 못 된다. 전문대가 PAGE ONE은 3층 건물인데다 인테리어 구조도 아주 독특하고 화려하다. 돌아다니다보면 끝이 없기도 하고, 백화점 같다는 생각도 든다. 워낙 관광명소처럼 되어버려서 그냥 와서 책은 안 보고 기념 사진 찍는 사람도 많다. 한국에도 베이징 필수코스 중 하나로 알려진 것 같았다. 그만큼 화려하긴 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거대한 스타벅스가 있는데 하나는 청나라스타일 스타벅스이고, 하나는 새로 만든 건데 그 새로 만든 스타벅스가 엄청나다. 3층에선 맥주까지 판다. 전세계 스타벅스 중 유일하게 맥주를 판다고 들었는데 정말 유일한지는 모르겠다.
싼리엔서점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여러 곳에 있다. 나는 베이징 칭화대학 앞에 있는 서점이랑 청두 여행 갔을 때 관착항자 안에 있는 서점에 갔었는데, 둘 중엔 청두 관착항자 서점이 훨씬 좋았다. 이곳은 다른 여느 서점들보다 인테리어와 배치가 뛰어나다. 당시 함께 갔었던 부모님이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엄청 감탄할 정도였는데 일단 전통적인 사합 기와집 안을 고쳐, 내부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모던했다.
서점 한 가운데 정원은 유리벽을 세워 서점이 지향하는 가치를 전시하고, 또 세 면의 각 공간엔 인문학 서적 위주의 책들과 커피숍 운영, 문구류 선물 가게, 아동 서적 코너를 나눠서 운영하고 있었다. 카운터도 따로따로 있어서 뭔가 독립적 공간 세 곳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서점의 생존 전략이 뭔지 잘 보여주는 구조였다.
단향공간은 서점이지만 커피숍도 함께 운영함으로써 책으로 못 채우는 매우는 수익구조라 커피 마시러 오는 사람도 많아 보이는 서점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이 단향공간은 아이친하이 백화점 3층에 있는 거였는데, 이처럼 베이징 서점들은 백화점 안에 입점한 경우가 많다. 아메리카노가 스타벅스보다도 더 비싸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지 않나.
아이친하이점보다 더 유명한 곳은 중앙미술학원 옆에 있는 본점이었는데, 여긴 확실히 더 강한 서점 분위기가 있다. 이곳이 베이징의 여러 유명 서점들 중에선 가장 '서점다운' 서점이다. 다만 잡지랑 문학 위주라는 점이 조금 아쉽다. 사회과학책은 거의 없고, 철학책도 찾기 힘들다. 그나마 팔리는 책이 문학책인 모양이다.
시시푸서점도 베이징에 몇 군데 있다. 주로 백화점 안에 입점해 있는데 단향공간이나 싼리엔서점보다는 덜 매력적이다. 중국에서 가장 전국적이고 큰 대형서점인 신화서점과 단향공간과 같은 커피숍형 대안공간의 사이에 어중간하게 위치한 느낌이 든다. 신화서점은 말 그대로 모든 책들이 다 있는 대형서점인데, 국가에서 운영한다. 그런만큼 책도 많고, 관방 서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베이징과 쿤밍에 있는 신화서점에 갔었는데 둘 다 엄청나게 컸다. 최근엔 자그맣게 책 읽는 공간도 따로 만드는 등 노력을 하지만, 썩 어울리진 않다.
쿤밍이나 청두 같은 도시엔 체인 서점보단 훨씬 핫하고 잘 나가는, 그 동네의 유명 서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쿤밍 윈난대학 앞에는 橡皮书店(썅피서점; 고무서점이라는 뜻)이나 大象书店(따썅서점; 코끼리서점이라는 의미), 漫林书苑(만린서원) 같은 서점들이 있는데, 베이징 서점 분위기랑은 꽤 다르다.
썅피서점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한 서점이다. 공간은 넓지만 서점을 아주 잘게 여러 방으로 나눠놓고 동화책처럼 꾸며놨다. 실제 동화책도 많이 비치돼 있고 인형이나 비싼 문구도 많았다. 서점이라기보단 인테리어용 소품을 찾는 사람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을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공간 자체가 너무 예뻐서 계속 찾아가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따썅서점은 쿤밍에서 제일 유명한 인문학 서점이다. 윈난대 동문 골목의 한 지하에 있는데, 50평 정도 되는 공간에 서점과 커피숍, 강연 장소가 함께 있다. 주로 인문학, 문학, 사회과학, 예술서적들이 있고, 레코드 음반도 같이 팔고 있었다. 또 매달 뮤지션을 정해서 그 뮤지션의 레코드판, 책 등을 함께 파는 테마 상품도 있었다.
이곳의 장점은 독립서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다른 서점에서 찾기 힘든 중국과 일본의 독립서적들이 꽤 많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 중국은 일본을 많이 좇고, 일본 책을 많이 찾는 것 같다. 다른 예로, 중국엔 쯔쭝(知中; 중국 알기)이라는 중신출판사(中信出版社)에서 발행하는 잡지가 있는데, 쯔르(知日; 일본 알기)와 함께 나온다. 쯔한(知韩)이 없다는 점이 슬프다. 이게 전반적 상황의 반영인 게, 보통 서점에 가서 문학 코너나 번역서들을 보면 일본 번역서는 있어도 한국 번역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유일하게 찾은 책이 문재인 대통령이 쓴 <문재인의 운명>이었다. 하, 하, 하. 매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유학을 오고 가는데 왜 그럴까.
쿤밍에서 열흘 이상 머무를 때 따썅서점에 자주 갔다. 커피 마시면서 책을 보거나 공부를 했는데, 커피도 맛있는데다 분위기가 편안하고 좋았다. 이곳 강연 공간엔 강연회를 비롯해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대학가 앞 교육,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적 가치를 지녀야 지속가능한 서점운영을 할 수 있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청두에서는 춘희로 국제금융센터(IFS) 옆에 方所(팡수워)라는 거대한 서점이 있는데, 내가 가본 서점들 중 가장 멋있는 곳이었다. 팡수워를 찾으려면 명품 옷가게가 몰려 있는 청두 대자사 옆 건물로 가야 하는데, 바깥에 표지판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헤맬 수밖에 없다. 나도 30분만에 찾았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더니 이 거대한 서점이 나타났다. 그건 서점이라기보단 대피 장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모든 게 세련됐다. 어떻게 해야 이 거대한 서점의 영업이 가능한지 치밀하게 고민한 산물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면 아주 넓은 아동서적 전문코너가 나오고, 왼쪽에는 서점의 주요 장소가 나온다. 초입엔 다양한 문구류가 많았는데 교보문고에서 비싸게 파는 그런 물건들이었다. 한 가운데엔 여러 개의 가판이 놓여 분야별 신간과 스테디셀러 책들이 놓여 있고, 사방의 계단 위로 올라가면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다.
또 서점 안에는 커피숍과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고, 더 반대쪽으로 가면 엄청 넓은 의류 판매장이 있었다. 서점에서 운영하는 혹은 서점과 함께 협업하는 의류 브랜드였다. 이 서점에 두 번 갔었는데 주되게 판매하려는 옷에 따라서 그 옆에 전시한 책들도 달라졌다. 공간 자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전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하루 온종일 머무를 수 있었다. 책을 찾아 읽다가,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반나절 내내 읽던 책과 더불어 옷을 살지도 모른다.
그밖에 베이징에는 BOOK WORM(书呆子;책벌레), 독자서방(读者书房)과 같은 여러 서점들이 있다. 북웜은 오래 전에 한 영국인이 살리툰 공티 인근에 만든 서점인데 찾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외국인 체류자들이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도 영문 책들 위주로 판매한다. 이 서점의 주요 수입원은 커피와 케잌 등 음료다. 주말이나 저녁에 다양한 행사를 많이 주최하는데, 인터넷 상에서 홍보를 볼 땐 영어로 토크하는 정기 행사가 제일 핫해보였다.
독자서방은 한국인이 많이 사는 왕징SOHO에 위치해 있다. 여기도 약간 어중간한 게 전반적으로 뭔가 컨셉있고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서점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긴 한데, 어딘가 조금씩 빈틈이 보였다. 이럴때 어느 한구석에서라도 뭔가 축 쳐진 느낌을 주면 안 되는데, 뜬금없는 폭탄세일이나 아무데나 방치돼 있는 빈 상자, 몇 달 지났는데도 꽃혀 있는 무가지 잡지 같은 게 보이면 아니다 싶지 않나. 망해가는 옛날 예술영화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