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에서 큰 신장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 또한 예외는 아니다. 현재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평균 신장은 6피트 1.5인치(186cm). 그 중에서도 2루수의 평균 신장이 5피트 11인치(180.3cm)인 반면 1루수와 우익수 그리고 투수는 6피트 2.5인치(191cm)로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평균 신장이 가장 크다.
전통적으로 투수는 신장이 큰 선수들이 선호되어 왔다. 현장 출신의 코칭 스태프와 스카우트들은 투수의 평가 요소 가운데 체격 조건을 중요하게 판단해왔다. 그리고 체격 조건은 여전히 투수의 평가 요소 가운데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야구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은 키가 큰 투수가 작은 투수보다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키가 큰 투수가 작은 투수보다 유리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키가 큰 투수가 보다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키가 큰 투수는 작은 투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긴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홈 플레이트를 향해 더 가까이에서 공을 던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같은 구속이라 할지라도 키가 큰 투수의 긴 익스텐션(스트라이드)과 긴 릴리스 포인트을 통해 던져진 투구는 타자들로 하여금 체감 구속을 더욱 빠르게 느끼게 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메이저리그에서 키가 큰 투수를 선호하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팀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다. 토론토가 정규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처음으로 지명한 190cm 이상의 장신 투수는 1986년 얼 샌더스였다. 신장 193cm의 우완 투수였던 샌더스는 그러나 메이저리그 데뷔에 실패, 마이너리그에서 30승만을 남긴 채 은퇴했다. 토론토가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장신 투수를 선택함으로써 가능성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크리스 카펜터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로이 할러데이를 통해 뛰어난 장신 투수의 매력을 맛본 토론토는 이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투수 26명을 지명했는데 그 중 신장이 190cm 미만인 선수는 5명 뿐이며 지난 9년간 지명한 7명의 투수의 평균 신장은 196cm에 달한다.
네이트 피어슨은 토론토가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장신 투수 유망주다. 2020시즌 MLB 파이프라인이 선정한 유망주 순위 중 전체 6위에 선정되기도 한 피어슨의 가장 뛰어난 무기는 단연 패스트볼이다. 신장 198cm, 체중 113kg의 당당한 체격 조건을 갖춘 피어슨은 평균 구속 90마일 중후반, 최고 구속 104마일에 육박하는 패스트볼을 던진다. 피어슨의 스카우팅 리포트에 따르면 패스트볼은 20-80 스케일에서 무려 80점 만점을 받기도 했다. 피어슨의 대학 시절 투수 코치이자 현재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어시스턴트 피칭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잭 보브는 2019년 인터뷰에서 피어슨이 4년 안에 110마일을 던져 메이저리그 최고 구속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피어슨은 청소년 시절부터 투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고교 재학 시절 농구와 축구를 병행하며 눈에 띄게 키가 커진 피어슨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투수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설정했는데 16세에 이미 패스트볼 구속이 90마일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투수로서의 몸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피어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팔꿈치 성장판에 골절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메이저리그 팀들의 관심을 잃게 되어 상위 지명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피어슨은 결국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았고 곧바로 대학으로 진학했다.
2016년 피어슨은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신입생 시즌을 마치자마자 센트럴 플로리다 칼리지로 편입했다. 선발투수로 뛰기 위한 결정이었다. 피어슨이 센트럴 플로리다 칼리지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 곳의 감독이었던 마티 스미스와 투수 코치였던 보브가 다른 학교와는 달리 피어슨의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세세한 계획을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선발투수로 뛸 수 있게 된 피어슨은 보브 코치와 함께 드라이브라인 베이스볼의 훈련 방법을 터득하면서 더욱 위력적인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주니어 칼리지와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훈련 시설이 열악해 선수의 기량을 제대로 단련시킬 수 없다는 인식이 스카우트 관계자들에게 뿌리 박혀 있었다. 피어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피어슨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쇼케이스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여전히 팔꿈치 부상과 주니어 칼리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토론토에게는 기회였다. 2017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피어슨은 충분히 1라운드 상위 지명을 받을 수 있는 재목임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 때문에 여전히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토론토는 결국 1라운드 22순위에 유격수 자원인 로건 워모스에 이어 28순위에 피어슨을 지명할 수 있었다. 같은 우완 강속구 투수이자 드래프트 동기로 전체 2순위에 지명된 헌터 그린의 계약금이 723만 달러인 반면 피어슨의 계약금은 3분의 1 수준인 245만 2900달러였다. 상대적으로 낮은 순위에 지명되긴 했지만 피어슨의 계약금은 1라운드에 지명된 우완 투수 유망주들 가운데 알렉스 랭(192만 5000달러)과 클라크 슈미트(218만 4300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다.
2017 드래프트 1라운드 우완투수 계약금 순위
1. 헌터 그린(신시내티) : 723만 달러
2. 카일 라이트(애틀랜타) : 700만 달러
3. 셰인 바즈(피츠버그) : 410만 달러
4. JB 부카우스카스(휴스턴) : 360만 달러
5. 알렉스 파에도(디트로이트) : 350만 달러
6. 태너 하우크(보스턴) : 261만 4500달러
7. 네이트 피어슨(토론토) : 245만 2900달러
8. 클라크 슈미트(양키스) : 218만 4300달러
9. 알렉스 랭(컵스) : 192만 5000달러
지난달 ‘디 애슬레틱’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팀에서 올 시즌 잠재력을 폭발시킬 선수를 선정했다. 토론토에서 선정된 선수는 바로 피어슨이었다. 2020시즌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피어슨은 지난해까지 17경기에 등판했지만 2승 1패 평균자책점 5.18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타구니와 팔꿈치 등 여러 부상과 9이닝당 볼넷이 6.8개에 달하는 제구 난조가 문제였다.
현재 피어슨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부상이다. 2018년 더블 A 시절 복사근 부상과 타구에 맞아 생긴 척골 골절로 한 해를 날린 피어슨은 2020시즌 팔꿈치 부상, 지난해에는 시범 경기 후 사타구니 부상과 시즌 중 어깨 부상을 당한 바 있다(지난해 11월에는 스포츠 탈장 수술을 받았다). 많은 야구인들이 키가 큰 투수가 작은 투수보다 부상의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4135⅓이닝을 소화한 랜디 존슨(208cm), 3577⅓이닝의 CC 사바시아(198cm), 2749⅓이닝의 할러데이(198cm) 등 많은 장신 투수들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등장한다. 그러한 주장이 완전한 정답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투수의 신장과 부상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며 스포츠 생리학, 인체 역학 등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올 시즌 피어슨의 관건은 건강하게 풀 시즌을 소화하는 것이다. 이미 토론토는 피어슨의 투구 수 및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피어슨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경기에 등판할 가능성이 높다. 경기에 꾸준하게 등판하는 것만이 경험을 쌓고 빅리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약점으로 꼽히는 제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난해 피어슨이 어깨 부상 회복 후 복귀해 불펜으로 등판한 11경기에서 압도적인 구위를 통해 평균자책점 2.84, 9이닝당 탈삼진 14.8개를 기록한 것은 다시 한 번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피어슨은 욕심이 많은 선수다. 피어슨은 높은 내구성을 갖춘 선발투수로서 긴 커리어를 만들고 아롤디스 채프먼의 최고 구속 기록을 경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스미스 감독과 보브 코치를 만나 설명한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명예의 전당급 커리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피어슨은 명예의 전당을 목표로 삼을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스포츠 선수에게 목표를 향한 욕심은 강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과연 피어슨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토론토는 피어슨에게 할러데이와 같은 장신 에이스가 되길 기대하고 있으며 이는 피어슨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 시즌은 피어슨에게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