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NPB) 현역 최고의 타자가 메이저리그로 자리를 옮겼다. 메이저리그 도전에 대한 의지를 꾸준히 드러냈던 스즈키 세이야(27)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포스팅을 허가하면서 미국 무대를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 99일간 진행된 직장 폐쇄로 협상 과정에 어려움을 겪었고 샌디에이고에 입단한다는 거짓 루머가 퍼지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지난 16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와 계약에 합의하면서 세이야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세이야가 컵스와 맺은 계약의 규모는 5년 8500만 달러. 이는 아시아 출신 야수의 메이저리그 입단 계약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종전 후쿠도메 고스케 4년 4800만 달러)로 이번 FA 시장에 대입해본다면 외야수 중에서는 크리스 브라이언트(7년 1억 8200만 달러)와 닉 카스테야노스(5년 1억 달러)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더불어 컵스는 이번 계약에서 전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보장해주면서 세이야에 대해 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히로시마에게 지불해야 할 포스팅 비 1462만 5000달러(2500만 달러의 25%, 2500만 달러의 17.5%, 3500만 달러의 15%)까지 더한다면 컵스가 세이야를 영입하는 데만 사용한 비용은 9962만 5000달러로 1억 달러에 육박한다. 현재까지 포스팅을 통해 빅리그에 진출한 아시아 선수 중 계약 금액과 포스팅 비를 더한 금액이 1억 달러를 넘긴 경우는 마쓰자카 다이스케(1억 310만 1111달러)와 다르빗슈 유(1억 1170만 3411달러) 그리고 다나카 마사히로(1억 7500만 달러) 뿐이다.
아시아 출신 야수 역대 입단 계약 순위
1위 스즈키 세이야(컵스) : 5년 8500만 달러
2위 후쿠도메 고스케(컵스) : 4년 4800만 달러
3위 마쓰이 히데키(양키스) : 3년 2100만 달러
3위 아키야마 쇼고(신시내티) : 3년 2100만 달러
5위 마쓰이 가즈오(메츠) : 3년 2010만 달러
그동안 아시아 출신 야수들은 대체적으로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노모 히데오와 박찬호를 시작으로 많은 아시아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것에 비해 야수 쪽에서는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추신수 그리고 오타니 쇼헤이를 제외하면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야가 포스팅을 신청하자 많은 메이저리그 팀들이 영입 경쟁을 펼쳤는데 이는 그만큼 세이야의 메이저리그 성공 가능성을 높게 측정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세이야 영입전에서 승리한 컵스는 이미 아시아 타자와 계약한 사례가 존재했다. 지난 2007년 12월에 영입했던 후쿠도메 고스케였다. 본래 유격수였던 후쿠도메는 2002시즌 우익수로 포지션을 전환하며 그 잠재력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6시즌에는 31홈런 104타점을 기록하면서 규정 타석을 소화한 센트럴리그 타자 중 타율(.351), 출루율(.438), 장타율(.653), OPS(1.091), wRC+(199) 등 다수의 주요 부문에서 1위에 오르며 MVP를 수상하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7시즌 오른쪽 팔꿈치 수술로 81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컵스는 4년 4800달러라는 당시로선 적지 않은 금액으로 후쿠도메를 영입했다. 후쿠도메가 일본에서 보여준 뛰어난 타격 실력과 골든글러브급 수비 능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후쿠도메는 컵스 입단 후 첫 3시즌 동안 타율 .259, OPS .778에 그쳤고 연평균 홈런은 11개에 불과했다. 결국 후쿠도메는 2011시즌 7월, 외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장을 물색하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이듬해인 2012시즌을 끝으로 통산 타율 .258와 42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심각한 체력 문제를 드러내며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이야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선수다. 도쿄 아라카와구 출신으로 니쇼가쿠샤대학의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한 세이야는 투타에서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주 포지션이 투수였던 세이야는 최고 148km까지 나오는 패스트볼을 앞세워 1학년 때 이미 팀의 에이스를 맡았다. 고교 타자로서도 43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활약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팀 전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고교 시절 세이야는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했고 지역대회 준결승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다.
고교 졸업 후 2012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세이야는 2라운드 지명으로 히로시마 유니폼을 입었다. 히로시마는 투수로서의 능력보다는 야수로서의 경험과 타격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계약 후 세이야를 투수에서 내야수로 전환시켰다. 이때 세이야는 자신의 등번호를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치로의 51번으로 정했다. 한편 세이야의 드래프트 동기로는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와 요미우리의 에이스인 스가노 도모유키, 한신의 후지나미 신타로 등이 있다.
세이야는 후쿠도메를 비롯한 여타 일본인 메이저리거와 같이 자국의 프로리그를 압도한 선수다. 지난해까지 일본에서 9년을 뛰며 5번의 올스타와 6번의 베스트나인에 빛나는 세이야는 MVP를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그에 필적하는 시즌을 여러 번 만들어냈다. 특히 양대 리그 통틀어 유일한 1 이상의 OPS(1.072)와 WAR(8.6)과 wRC+(199)에서 1위를 차지한 지난 시즌이야말로 MVP를 수상하는 듯 했지만 63승 68패 12무로 센트럴리그 4위에 그친 팀 전력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럼에도 지난 시즌 세이야가 리그를 압도한 MVP급 활약을 펼쳤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세이야는 그 누구보다도 꾸준한 선수다.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 처음 맞이하는 풀타임 시즌이었던 2016년, 세이야는 타율 .335와 29홈런을 터뜨리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까지 세이야는 화려하면서도 꾸준한 활약을 펼쳐왔다. 2016시즌 이후 단 한 번도 WAR이 5.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세이야는 NPB 역사상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1963-1970), 역대 최고의 우타자라 불리는 오치아이 히로미쓰(1981-1987)와 함께 6년 연속 3할 타율과 25+홈런을 기록한 역대 세 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세이야가 메이저리그 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타격 외에도 수비와 주루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세이야는 명실상부 일본 최고의 파이브툴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NPB 통산 도루 성공률은 61.2%로 그리 높지 않지만(통산 82도루), 50m를 5.8초에 주파할 수 있는 세이야는 뛰어난 수비수이기도 하다. 일본 최고의 강견이라 평가받는 강력한 송구 능력과 넓은 수비 범위를 통해 골든글러브(수비상)를 5번이나 수상한 세이야는 여러 개의 툴을 보유한 것을 선호하는 메이저리그의 최근 트렌드와도 알맞은 선수다.
아시아 출신 타자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가장 큰 변수가 되는 것은 패스트볼 대처 능력이다. 지금까지 미국에 진출한 많은 아시아 출신 타자들은 KBO리그(142km/h)와 NPB(145km/h)에 비해 더 빠른 공을 던지는 메이저리그 투수들(150.8km/h)을 상대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2020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쓰쓰고 요시토모(피츠버그)와 아키야마 쇼고(신시내티) 또한 패스트볼 공략 여부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2시즌간 쓰쓰고와 아키야마는 메이저리그 투수가 던지는 포심을 상대로 각각 타율 .203(득점가치 -5.1)와 .250(득점가치 -3.3)에 그치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했다.
쓰쓰고와 아키야마는 NPB 시절에도 포심 대응 능력이 리그를 압도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2014시즌 +14.1, 2015시즌 +18.9의 포심 상대 득점 가치를 기록했던 쓰쓰고는 2016시즌 +30.5를 기록, 그 해 타율 .322와 44홈런을 터뜨리며 주가를 높였지만 이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밀어치는 타격에 집중하면서 포심 대응력이 크게 떨어졌다. 미국 진출 직전이었던 2019시즌 포심 상대 득점 가치가 +12.6까지 떨어진 쓰쓰고가 메이저리그에서 빠른 공을 상대로 고전할 것이라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아키야마 또한 2016시즌 +24.0을 기록했을 뿐 2018시즌과 2019시즌에는 +14.9와 +15.1로 이전에 비해 포심 대응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반면 세이야는 NBP에서 포심 공략을 가장 잘하는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16시즌 이후 포심 상대 득점 가치가 무려 +123.8에 달하는 세이야는 2018시즌(+14.3) 외에는 모두 +20.0 이상을 기록하면서 ‘포심 킬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특히 2019시즌 이후에는 +26.9(5위), +20.8(5위), +21.3(4위)을 기록하면서 포심 상대 득점 가치 부문에서 양대 리그 통틀어 줄곧 5위 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더욱이 세이야는 레그킥과 토탭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타자다. 레그킥을 통해 많은 장타를 생산해내는 유형인 세이야는 토탭으로도 담장을 넘기는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세이야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빠른 공을 치기 위해 레그킥을 포기한다 해도 장타를 생산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최근 3년간 262볼넷 242삼진으로 이전(2015-2018시즌 219볼넷 313삼진)에 비해 선구안이 크게 좋아진 점까지 고려한다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패스트볼을 상대로 쓰쓰고나 아키야마보다는 세이야가 훨씬 나은 대응력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출신 현역 메이저리거 패스트볼 상대 통산 성적(타율/장타율/득점가치)
쓰쓰고 요시토모
패스트볼 상대 .197/.338/-13.6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183/.287/-4.0)
아키야마 쇼고
패스트볼 상대 .209/.264/-12.8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218/.267/-3.7)
오타니 쇼헤이
패스트볼 상대 .286/.598/+47.6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252/.544/+19.5)
김하성
패스트볼 상대 .230/.366/-3.0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204/.344/-5.6)
최지만
패스트볼 상대 .252/.485/+9.8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223/.437/+7.3)
박효준
패스트볼 상대 .186/.349/-7.4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128/.170/-6.1)
*추신수
패스트볼 상대 .316/.528/+244.4 (93마일 이상 패스트볼 상대 .299/.489/+75.2)
2015년, 히로시마에는 과거의 에이스였던 구로다 히로키가 돌아왔다. 메이저리그에서 7년간(2008-2014시즌) 79승 평균자책점 3.45 bWAR 20.9를 기록하고 돌아온 구로다는 당시 만 20세이자 외야수 전환을 준비 중이었던 세이야에게 한 메이저리그 선수의 경기 영상을 볼 것을 권했다. 영상의 주인공은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이었다. 메이저리그를 즐겨보지 않았고 흥미도 없었던 세이야는 같은 야구를 하고 있음에도 많은 차이가 나고 세상에는 이렇게 멋진 선수가 존재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이겨보고 싶다는 프로로서의 경쟁심이 미국 진출의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때문에 컵스에서의 등번호 역시 27번을 선택했다).
세이야는 유쾌한 성격을 가진 선수다. 히로시마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팬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자신의 소개 영상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주저없이 보여준 세이야는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금욕적이고 진중한 모습만을 보여준 많은 일본인 선수와는 달리 세이야의 유쾌한 모습은 팀 동료들로 하여금 더욱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올해 27세인 세이야는 메이저리그에서의 첫 시즌을 맞이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치로 역시 27세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세이야는 시범경기 데뷔전에서 마치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때 같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그리고 올 시즌 메이저리그 루키로서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세이야는 아시아 출신 타자의 잔혹사를 끊을 수 있을까. 세이야의 새로운 도전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스즈키 세이야 NPB 시즌별 성적
2016 : .335/.404/.612 29홈런 95타점 wRC+ 184 WAR 7.3
2017 : .300/.389/.547 26홈런 90타점 wRC+ 155 WAR 5.1
2018 : .320/.438/.618 30홈런 94타점 wRC+ 172 WAR 5.2
2019 : .335/.453/.565 28홈런 87타점 wRC+ 177 WAR 8.1
2020 : .300/.409/.544 25홈런 75타점 wRC+ 163 WAR 5.3
2021 : .317/.433/.639 38홈런 88타점 wRC+ 199 WAR 8.6
참조 : 베이스볼 레퍼런스, 팬그래프, 베이스볼 서번트, 스포트랙, 에센스 오브 베이스볼, NPB 스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