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 발생 후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운영된 2021시즌, 메이저리그는 관중의 입장을 100% 허용하면서 ‘내셔널 패스트타임(국민의 여가)’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2022년 2월 현재 내셔널 패스트타임은 다시 한 번 위협받고 있다. 2017-2021 CBA(노사 단체 협약)가 종료되면서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2017-2021 CBA는 미국 동부를 기준으로 지난해 12월 1일 오후 11시 59분에 만료됐다. 이후 사무국과 선수노조는 새로운 CBA 협약을 위해 협상을 진행했지만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구단주측은 만장일치로 직장 폐쇄(락아웃)를 결정했다.
협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지만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고 있다. 사무국은 지난 19일(한국시간), 오는 27일 개막 예정이었던 시범 경기를 다음달 6일에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선수 노조는 반발했다. 또한 25일, 메이저리그 대변인은 다음달 1일까지 협상이 완료되지 않으면 정규 시즌이 취소되고 새로운 스케줄로 진행될 것이며 선수들은 취소된 경기 동안 연봉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같이 사무국과 선수 노조의 대립으로 리그 운영이 마비된 것은 이번이 9번째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선수 노조의 파업과 사무국의 직장 폐쇄는 현재까지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72년 파업
메이저리그 선수 노조는 1954년 탄생했지만 설립 초기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구단주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미국 철강 노조의 경제 고문과 대표 보좌관을 지냈던 마빈 밀러가 1966년 선수 노조의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72년 선수 노조의 파업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됐다. 정규 시즌 초반 2주간 진행된 1972년 파업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파급력은 상당했다.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 행동을 불사한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가 된 이는 세인트루이스의 중견수 커트 플러드였다.
7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1963-1969)하고 226경기 연속 무실책을 기록한 플러드는 1960년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었다. 1958시즌부터 12년간 세인트루이스에서 활약했던 플러드는 1969시즌 종료 후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됐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베테랑이었던 플러드는 그러나 팀에게서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채 취재 기자에게 트레이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선수에 대한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 했던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보류 조항(reserve clause)’이라는 규정이 있었다. 보류 조항은 선수를 구단의 소유물로 인식하여 그에 대한 권리를 구단이 모두 소유하는 독소조항이다. 때문에 플러드는 마치 물건을 사고 팔 듯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트레이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플러드는 필라델피아의 인종차별적인 팬과 부진한 성적(1969시즌 63승 99패) 등의 이유를 들어 보류 조항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플러드는 당시 커미셔너였던 보위 쿤에게 자신을 자유 계약 선수로 인정해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거절당했고 1970년 1월 17일, 사무국을 연방 독점금지법 위반 혐의로 1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1972년은 마침 선수 노조와 구단주 측이 합의한 3년간의 연금 협정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선수 노조는 선수 연금에 대한 구단주들의 협조를 요구했지만 구단주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밀러는 시즌 파업을 제안했고 선수들은 고민에 빠졌다. 구단주들의 보복에 두려움을 느낀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러드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선수 노조는 팀당 2명의 선수를 파업 결정에 대한 투표자로 선출했고 전체 48명 중 47명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4월 2일부터 14일까지 파업이 진행되었다. 시즌 파업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처음 겪어본 구단주 측은 선수 노조의 사전 연금 제의와 50만 달러의 연금 인상에 동의하면서 시즌이 시작되었다.
한편 밀러와 함께 소송을 진행한 플러드가 얻은 결과는 패소였다. 1972년 6월, 연방 대법원이 5대3으로 사무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위한 플러드의 기백 있는 결정은 당시 메이저리그의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선수들의 굳어진 인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1973년 직장 폐쇄
1973시즌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중요한 한 해 중 하나다. 아메리칸리그는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해 야구 경기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조선 회사와 스포츠 구단 그리고 극단 사업의 경영자였던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CBS로부터 1,000만 달러에 뉴욕 양키스를 인수하면서 ‘보스’가 된 해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직장 폐쇄가 일어나기도 했다. 구단주들은 플러드의 소송과 선수 노조의 파업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곧바로 상황이 바뀌는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1973년 직장 폐쇄는 연봉 조정 조항에 대한 협상으로부터 비롯됐다. 1972년 86경기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관중 수입의 손해를 주장하고 있었던 구단주들이 선수 노조로부터 받은 새로운 CBA에 대한 협상안에는 2년차 이상의 선수에 대한 연봉 조정 규정이 있었다.
구단주들은 새로운 CBA 조항에 연봉 조정이 추가되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9일부터 직장 폐쇄를 가동했다. 그러나 1972시즌과 같이 정규 시즌 경기가 취소되는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구단주 측은 결국 연봉 조정에 대한 조항 추가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2월 26일, 새로운 CBA 체결 후 곧바로 스프링 트레이닝은 재개되면서 1972시즌과는 달리 1973년 정규 시즌은 정해진 날짜에 개막했다.
1976년 직장 폐쇄
비록 플러드는 소송에서 패했지만 선수 노조의 위원장이었던 밀러는 선수들의 권익 실현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밀러가 보류 조항을 무너뜨리고 자유계약 선수 제도(FA)를 도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1974년 말이 었다. 1974시즌 41경기에 선발 등판해 25승과 평균자책점 2.49를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차지한 캣피시 헌터는 당시 소속팀이었던 오클랜드가 연금 보험을 따로 지불해주겠다는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아 곤경을 겪고 있었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밀러는 오클랜드에 이의를 제기했고 조정 위원회가 밀러의 손을 들어주면서 헌터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FA가 되어 양키스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1976년 3월, 드디어 메이저리그에는 본격적으로 FA 제도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1975시즌 종료 후 밀러는 당시 다저스에서 뛰었던 앤디 메서스미스와 몬트리올에서 뛴 데이브 맥널리가 계약서를 쓰지 않고 시즌을 치른 것을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이의 제기를 신청한 밀러는 조정 위원회에서 매년 선수를 팀에 묶어 놓는 보류 조항의 무효화와 메서스미스와 맥널리의 FA 신분 획득을 주장했다. 밀러의 주장이 충분히 신빙성이 있으며 야구가 연방 독점금지법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생각한 피터 세이츠 당시 조정관은 메서스미스와 맥널리가 계약상 의무를 충분히 이행했으며 이를 토대로 FA 신분을 획득했다고 판결했다.
당연하게도 구단주들은 판결을 탐탁치 않아 했다. FA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던 구단주들은 판결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직장 폐쇄를 선택했다. 그러나 연방 법원이 세이츠 조정관의 판결을 옹호했고 여론 또한 선수들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던 쿤 커미셔너가 중재에 나서 직장 폐쇄를 중지하고 스프링 트레이닝을 재개했다.
FA 제도의 도입은 막을 수 없는 바람이었다. 1973년 CBA 종료 후 협상에서 큰 입장 차이를 보였던 구단주들과 선수 노조는 새로운 합의 없이 1976시즌을 시작했고 그 해 7월, 4년 규모의 새로운 CBA를 통해 비로소 FA 제도를 확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980년 파업
1976년에 체결한 4년 간의 CBA가 종료되고 사무국과 선수 노조는 새로운 협상을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새로운 CBA 협상의 쟁점은 바로 FA 계약에 대한 보상이었다. FA에 대한 보상을 제안한 이는 쿤 커미셔너였다. 이미 NFL과 NBA에서 효과를 본 FA 보상 제도를 통해 쿤 커미셔너와 구단주들은 FA 시장 자체를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양측은 FA 선수의 원 소속팀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규정할지 선수 두 명(밥 분, 살 반도)과 경영진 두 명(해리 달튼, 프랭크 캐셴)으로 이루어진 연구 위원회까지 구성하며 협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애초부터 FA 제도가 탐탁치 않았던 구단주들이 선수 노조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너무 큰 입장 차이로 인해 협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수 노조는 자신들의 확실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4월 초 8일간 파업을 진행했지만 역시 정규 시즌이 단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행히 FA에 대한 보상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에 대해 합의를 이룬 양측은 1980년 5월, 시즌이 끝난 후 매듭짓지 못한 문제에 대해 협상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보류는 곧 벌어질 대혼란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1981년 파업
FA 제도의 도입으로 선수 노조의 영향력은 크게 증가했다. 선수들이 FA를 통해 큰 돈을 만질 수 있게 된 만큼 FA 선수 보상의 협상 문제를 빨리 매듭짓는 것이 중요했다. 1981년의 정규 시즌은 일정대로 개막했지만 FA 보상에 대한 협상은 계속 이어졌다. 구단주들이 처음 제시한 방안은 FA 선수와 계약한 팀이 원 소속팀에게 로스터에 포함된 선수 한 명과 드래프트 지명권을 보상해주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선수 노조는 구단주들의 방안이 FA 시장을 훼손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1981년 6월, 밀러는 FA 선수의 원 소속팀이 나머지 팀의 보유 선수 가운데 한 명을 지명해 영입하는 방식을 구단주들에게 제안했다. 또한 FA 선수 중 한 포지션에서 상위 20%에 해당하는 그룹을 A타입, 상위 21~30%에 해당하는 그룹을 B타입으로 나눠 등급에 따라 보상을 받도록 하고자 했다. 즉 A타입 선수를 잃은 원 소속팀은 새로 계약한 팀으로부터 드래프트 지명권을 받고 동시에 다른 팀들이 보호 조치를 하지 못한 선수 한 명을 지명해 영입할 수 있는 것이다. 선수 노조의 제안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상황에서 구단주들은 각 팀당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선수를 12명으로 제한해 A타입 선수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고자 했지만 선수 노조가 반대하면서 쉽게 결론을 짓지 못했다.
선수 노조는 자신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구단주들이 협상에 비협조적이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했다. 이후 구단주들은 가처분 명령을 받았고 이틀 내에 파업을 진행하지 않으면 해당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선수 노조는 결국 6월 13일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은 무려 세 달에 걸쳐 진행됐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이토록 긴 기간 동안 파업이 진행된 것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 시즌이 중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구단주들은 팀당 선수 12명을 보호하는 제안을 철회했고 팀당 선수 26명을 보호하는 방식이 채택되면서 선수 노조는 A타입 FA 선수에 대한 보상의 수준을 크게 낮추는 본래의 목표를 성취해냈다.
8월 1일에 끝난 50일의 파업 기간 동안 취소된 경기는 무려 712경기였다. 엄청난 수의 경기가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에 쿤 커미셔너는 전-후기제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파업이 시작되기 전의 지구 1위 팀이 전기 리그의 우승팀, 시즌이 재개된 이후의 지구 1위 팀이 후기 리그의 우승팀이 되어 플레이오프에서 디비전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파업이 시작되기 전 각 지구 1위였던 양키스(AL 동부)와 오클랜드(AL 서부) 그리고 필라델피아(NL 동부)와 다저스(NL 서부)가 전기 리그의 우승팀이 되었고 파업 종료 후 재개된 후기 리그에서는 밀워키(AL 동부)와 캔자스시티(AL 서부) 그리고 몬트리올(NL 동부)과 휴스턴(NL 서부)이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통합 우승이 없었기 때문에 전기 리그에 이미 우승을 거둔 네 팀은 후기 리그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이는 곧 흥행 부진으로 이어졌다.
한편 시즌 전체를 통틀어 최고 승률을 기록한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즌 전체 성적이 66승 42패(.611)로 메이저리그 전체 승률 1위였던 신시내티는 그러나 전기 리그에서 35승 21패로 반 경기차 2위, 후기 리그에서 31승 21패 1.5경기차 2위에 머무르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신시내티는 파업으로 인한 전-후기제의 희생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