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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기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부터 단련하고 있었더라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리랜서와 N잡을 하면서, 많은 의견과 평가, 걱정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말 들 중에서


넌 흔들림 없이 계속 나아가는구나.


이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실 흔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버둥거리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중심을 잘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 하다.


돌이켜 보면 비주류에 가까운 성향 때문에 흔히 주변에서 '뒷말이 나오는' 일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때도 많았고, 없는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회초년생 때는 안정성이 보장되는 회사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지금이야 많은 케이스가 있지만, 10년 전이라 곱지 않은 시선이 더 많았다. 프리랜서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지금은 당연하고 어느 정도의 대안이 되는 것들에, 몇 년 더 빨리 시작하게 되었다.


난 시대의 흐름을 미리 캐치해 먼저 자리를 잡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때도, 프리랜서를 시작할 때도 이게 나한테 더 맞겠다라는 생각으로 한 것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거나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하는 편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결혼이나 자녀 계획만큼 큰 결정도 아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다가 큰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고, 프리랜서를 하다가 다시 회사를 다닐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안 죽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시기가 지금보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던 것 같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책임질 것도 그다지 없었고, 반대로 힘은 넘쳐 흘러서였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당시 그 흔한 단과 학원 다니지 못하고 과외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에야 지금보다 '어떻게든 비빌 수 있는' 구석이 많아 시기를 잘 탔던 것 같다. 그럼에도 당시 선생님들이 후배들에게 쓸 '교보재'로 내 사례를 잘 활용했다고 하니, 끝까지 잘 버티고 나아갔던 것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90년대 후반에 작은 공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1997년 IMF의 직격타를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대신 부모님은 본인들의 건강을 갈아넣었다. 수능 100일 전, 나는 응급실에 보호자로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학원을 간다, 과외를 한다라는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게 전부인 것처럼 가르쳤던 그 때 그 시절에, 다행히 노력에 비해서는 성적이 잘 나왔다. 물론 학교 수업으로만으로는 버거운 부분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수학 시간에 다항식을 나누는 걸 배우고 있었고, 수학 선생님의 시나리오는 누군가를 다항식을 '노가다'로 나누게 한 다음 '조립제법'이라는 쉬운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로 내가 지목되었고, 조립제법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으니 후다다닥 다항식 나누기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앉은 자리에서 누군가가 "저건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조립제법으로 풀면 되는데."라고 빈정거렸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엄마가 치맛바람 좀 일으킨다는 녀석 중 하나였다.


물론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수업 끝나고 끌어내서 매운 맛을 보여줄까 하다가 말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낭만의 시대'라고 불렀던 그 시절, 한 학년에 600명이 넘는 학생이 우글거리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런 소리는 '싸우자'와 같았다. 주먹다짐을 하면 왜 싸웠냐고 선생님한테 두들겨 맞고 끝나곤 했다.


다만 그 얘기에 매우 흥분한 다른 친구들이 "넌 그렇게 돈 쓰고 공부해서 노가다로 푸는 쟤보다 공부 못하냐"라는 육두문자 섞인 욕을 해 교실은 난장판이 되고, 그나마 그당시 호인이었던 수학 선생님이 그 몇 명을 쥐어박는 걸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대신 매운 맛은 학교 성적으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때부터 잘난 체를 했던 그 녀석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일을 의외로 마음에 담아 두었던 친구들이 있었고, 나 자신보다도 이런 결과에 대해 더 통쾌해 하는 게 기가 막혔을 뿐이었다.




선행학습도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잘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난감했다. 시간도 많이 뺏기기도 하고, 혼자서 하다 보니 이게 맞나 싶을 때가 많았다.


그 때 어떤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했던 게 생각났다.


"어떻게 이놈의 학교에서는 모르는 걸 물어보는 놈들이 없냐."


그때까지 학교를 다녔던 경험에서 느낀 선생님들이란, 뭔가 귀찮고 새로운 일을 피곤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궁금한 게 있어도 딱히 가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영어 문제를 들고 영어 선생님께 찾아갔다.


"아니, 전근 갈 때가 다 되었는데 모른다고 물어보러 온 애는 네가 처음이다."


모르는 걸 해결해서 고마운 건 나인데, 어떻게 선생님이 더 고마워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뒤로는 다른 과목도 편하게 다른 선생님들한테 물어볼 수 있었고, 3학년 때 수시 원서를 쓸 때에도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문제집은 고등학생이 생각하기에 참 비쌌다. 저걸 다 사자니 부담이 되어서, 우선 한 살 많은 형이 쓰던 문제집을 받아 지우개로 형이 풀었던 흔적을 다 지워서 풀었다.


그런데 형이 쓰던 문제집을 풀다 보니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형이 문제를 풀었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과정이 바뀌어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형이 풀었던 흔적 중 가장 공부하기에 걸렸던 건 5지선다 문제 중에서 어떤 답에 체크를 했는지였다. 그래서 주관식으로 답을 생각해 문제를 푸는 걸로 해결했다. 알아주던 모범생이었던 형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풀었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풀 수 없는 문제는 형에게 물어봐서 표시를 해 놓았다. 내 학년부터 미분과 적분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미분 적분이 포함된 문제는 풀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새로 생긴 과목은, 의외로 쉽게 문제집을 구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께 모르는 걸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해결한 것이다. 선생님들에게는 문제집이 차고 넘쳤고, 그 문제집을 그냥 가져가면 선생님들도 처치 곤란한 짐을 일부 해결해서 후련해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수능 모의고사 성적에도 신경쓰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립학교였고, 지금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공립 고등학교에서는 사설 모의고사를 볼 수가 없었다. 학원을 다니면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보면 되는데, 모의고사를 보자고 학원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 중에서 '영업을 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함께 모의고사를 보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친구가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학원 선생님들의 눈빛은 딱 '이상한 놈이 또 이상한 놈 하나 데리고 왔구나'의 느낌이었다. 결국 대충 풀고 빨리 가라는 식의 눈치주는 말도 들었다.


모의고사 성적표는 친구를 통해 건너서 전달 받았다. 학원 평균을 올려주는 데 기여했으니 계속 와서 봐도 된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몇 번 시험을 본 후에는 지나친 '영업'으로 가지 않게 되었지만, 도움을 받았으니 그걸로 족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능을 봤고, 성적은 그동안 봤던 모의고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다만 운좋게도 가채첨 후 마음 편하게 응시했던, 수능 이후에 시작하는 수시모집에 합격해 목표했던 이상의 학교를 입학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시절은 앞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때라고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20년도 더 된 그 때 그 시절에는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목표를 위해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N잡과 프리랜서를 함께 하는 상황이 물론 주류의 삶은 아니다. 길을 만들어 가야 하고, 그만큼 불안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면 나만의 길이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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