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들어와서야 마케터로서 깨달은 것들
20여년 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PD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방송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카메라를 처음 잡았을 때보다, TR이라고 불리던 트레이닝 때 선배들이 해줬던 말들이 내 기억에 더 선명히 남아있다.
"1만큼의 결과를 내고 싶으면, 촬영과 편집에 2만큼의 노력을 들여야 해. 그리고 그만큼 촬영과 편집을 하려면, 기획에서 4만큼의 노력을 들여야 해."
"철학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 기획이 나와."
그때의 나는, 이 말들을 흘려들었다. 결과가 눈에 보이는 일들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과 편집이 항상 먼저고, 기획은 "일단 찍으면서 생각해 보자."면서 뒤로 밀리곤 했다. 결과물은 그 당시 내가 봐도 어설펐고, PD는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군대에 다녀온 후 취업을 준비했다.
시간이 지나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영상이 아닌 신제품 기획과 캠페인이 내 결과물이었다. 촬영 대신에 숫자를, 편집 대신에 메시지를 다루었다. 연차가 쌓이면서 잔기술이 아닌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단단한 코어와, 생각의 깊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점점 깨달았다. 그리고 대학교 때 선배들이 해줬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왜 기획에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AI 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AI는 기획에 들어야 할 고민과, 흔히 말하는 '노가다'의 시간을 줄여 주었다. 문장을 써주고, 이미지를 만들고, 기획안의 뼈대까지 빠르게 세워주고 있다. 대신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그럼 사람의 역할은 무엇일까? 무엇을 질문하고,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선배들이 해줬던 또다른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철학책을 읽으라는 게,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체력을 기르라는 것이었구나.
AI는 이제 웬만한 실행을 대신해 준다. 문장을 써주고, 이미지를 만들고, 기획안의 뼈대를 빠르게 세워준다. 속도와 효율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환경에서 사람에게 남는 역할은 점점 명확해진다. 무엇을 물을 것인가,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최근에 위 기사를 접했는데, 이 기사에서는 AI 시대에 철학이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을 더 많이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AI는 답을 잘 만든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질문의 질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이 작동한다.
물론 철학은 업무 스킬이나, 속도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신 기획에 필요한 사고의 프레임을 만든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효율보다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는다. 주니어 때는 좋은 기획이 화려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어떤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할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이 상황을 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방송반 시절의 선배들이 해줬던 말은, 기획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보고 했기보다는 경험적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알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기획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기획을 위한 노력의 연료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