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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안나 Sep 14. 2018

3. '본능적'이 아니라, '의식적'인 신생아 키우기

산후우울증의 늪에서 우아하게 걸어나오고 싶었지만-2편

  호주에서는 산모가 아이를 낳고 퇴원한 후엔 미드와이프(산부인과 전문 간호사)들이 집으로 한동안 방문한다.  그들은 산모와 아이의 건강, 신생아 돌보는 방법 교육, 집안 환경 점검 등의 일들을 한다.
첫째를 낳고 난 후, 우리집에도  미드와이프가 방문했다.

 "남편이 널 물리적으로 때리거나 정서적으로 학대하지는 않니? 그가 두렵진 않니?지금 널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는 뭐야? 경제적인 문제는 없니?부모님과의 사이는 어때? 응급 상황에 널 도와줄 친구나 지인이 가까이 있니?"

 나는 이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미드와이프란 직업이 얼마나 멋진가 생각한다. 이들은 그 어떤 공권력보다 먼저 빠르고 안전하게 한 가정을 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내 남편의 '문제 성향 없음'을 비롯해 상황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남편과는 수십 가지 사소한 이유로 자주 다투고 있는데 근원적인 문제는 내가 너무 뾰족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말하면서 반성한다.)
그리고 우울하단 생각을 자주 하고 절실하게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고도 고백했다.
 그녀는 버벅대는 내 영어를 인내심 있게 모두 듣고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자신이 한국말을 진작 배우지 않았다는 점이 후회스럽다고 서너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넌 친구를 금방 사귈 수 있을거야. 가벼운 산책부터 시작해 봐. 그리고 집에 있는 아들 같은 친구(남편)와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해 봐."

 그녀는 내게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언제든 친구가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도 이야기하며 떠났다.

 막막했다.
그 때는 알지 못했으므로.

 나는 늘 아기 때문에 수많은 제약이 생겼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아기 덕분에  사려 깊고 따뜻하며 깊은 연대감으로 똘똘 뭉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몇 년 뒤에야 깨달았다. 그들의 지원 사격이 없었더라면... ...  나는 지금쯤 또 어디선가 끝없이 표류 중이겠지.


 <2편- 외부 환경 새로 고침>

 

1. 남편과 나, 서로의 '프로 공감러'가 되길 희망하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 부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리고 각자의 사정으로 몹시 피곤했지만 서로에게 이해받기만을 바라며 자주 다퉜다. 나는 그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내가 자신에게 너무 소홀하다고 서운해했다. 그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 오늘잠정적 평온 상태에(?) 이르렀을까. 곰곰이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하나 있다. 그가 나와 다투다가 극적으로 화해한 직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래도 당신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일단 들어주잖아.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잔인하고 야비하게 그를 공격했는지 이 사람은 잊었단 말인가.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겠지. 쌍방과실이니까 그냥 묻어두려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이 온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남편이 내 궤변을 참고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남편 생각은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싶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설득당할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비로소 내 우울과 피곤에 대해 그가 이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소외감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때부터 육아와 가사 분담에 대한 선순환적 구조도 가능해졌다고 기억한다.

 둘째가 태어나고 더 바쁘고 피곤해졌지만 아침에 헤어졌다가 저녁에 재회한 우리는 늘 서로의 하루를 위로하는 시간을 짧게나마 갖는다. '누구나 다 하는 육아'라든가, '왕년에 나도 해 본 사회 생활'이란 투의 말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쓰지 않는다.

 대신, 너클볼(야구 구종 중 하나)과  최신 미드에 대해 신나게 수다를 떨 뿐이다. 나는 너클볼러들은 전담 포수가 있다는 그의 얘기에 놀라고 그는 최신 미드 범인을 이미 추리해 맞춘 내게 놀라는 중이다.

 물론 이 모든 대화는 아직도 아이들의 협조가 매.우. 필수적이긴 하다.

부부 생활은 길고 긴 대화 같은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는 다른 모든 것은 변화해 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대화에 속하는 것이다.
-프리드니히 니체


2. 전폭적인 지지와 용기를 퍼주어 줄 친구를 섭외하다.

 로다(Rhoda) 할머니와 근황 얘기를 하다가 지나는 말로 내가 말했다.


 "남편은 너무 바빠요. 가끔은 왜 하필 사업하는 사람과 결혼했을까 싶어요."


 로다가 웃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내게 말했다.


난 그 고민을 40년째 하고 있어. 내가 며칠 더 고민해 보고 답을 줄게. 넌 케잌이랑 커피 좀 마셔. 난 네가 뭔가 먹는 걸 지켜보는 게 좋거든.


 마침 조지(George) 할아버지는 내게 줄 커피를 만들어 정원으로 나오시던 중이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으셨는지 그도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제 케잌과 쿠키가 놓여 있고 내 아이들은 잔디밭 위를 뛰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멀리서부터 조용히 불어오고 있고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다.

 로다는 나의 다정한 이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틸다 스윈튼을 닮았다고 생각했다.(덕분에 얼굴을 금방 외울 수 있었다.) 원래 그녀는 나와 가까운 곳에 살았는데 작년에 바닷가 근처로 이사했다. 나는 그녀가 너무 그리워서 초보 운전임에도 용기를 내 우리 동네를 벗어나 일주일에 한 번 그녀에게 갔다.(그래봐야 차로 20분 거리지만) 덕분에 나는 운전 실력이 늘었고 멋진 우정을 얻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첫째 아이 손을 잡고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나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학교에 나타난 촌스러운 전학생처럼 Hello를 연발하고 다니면서 이웃들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나자, 나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고 그 힘으로 우울함과 조금씩 이별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로다는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마. 넌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나는 늘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운이 좋은 엄마다,라고만 얘기해 왔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얘기를 꺼내본 적이 없다. 갑작스런 로다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물이 일렁이기 전에 차에 올라타야 할까보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육아엔 답이 없고 온통 선택만 있다. 그 때문에 현명한 누군가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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