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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키 크룸로프’로의 신혼여행(?)

by 양문규

내가 체코에 가서 살던 시기가 2010년대 중반 무렵인데, 당시엔 한국의 신혼부부들이 그곳으로 신혼여행을 많이 왔다. 이들이 체코를 오면 프라하 말고 꼭 가는 곳이 체스키 크룸로프였다. 이 도시는 도시 자체가 크지도 않거니와,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다. 사진 풍경도 그렇지만, 실제 가서 봐도 아기자기하고 예쁜 거리와 건물 모습이 마치 중세의 빈티지 테마파크를 보는 것과 같다.


도시가 아름다우려면 강을 껴야 하는데, 이 도시는 그냥 끼고 있는 게 아니라, 조그만 마을을 S자 커브를 그리며 돌아 흘러간다. 또 절벽 바위에 세워진 중세의 성은 마을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서(체코서 두 번째로 큰 성이라 한다.) 마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폭격을 피해 옛집들이 그대로 보전이 돼, 동유럽 특유의 붉은색 지붕들이 보석 같이 펼쳐있다. 그곳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가는데, 그쪽의 검은색 지붕들과 대조적이다. 아름다운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은 신혼부부 여행객으로선 제 격의 관광지다.


나의 경우, 결혼 당시 시간강사 신분에 마음의 여유도 없어 인근 온천지를 하루 갔다 오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그나마 신혼 초 도둑이 들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필름 통과 함께 도둑맞았다. 사진에 특별히 야한 내용도 없었건만, 참 엽기적인(?) 도둑이 든 셈이다. 온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니 아까울 거야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신혼여행 사진이 없다. 이후 애들 낳고 키우며 어딜 여행 가서 둘만이 오붓이 사진을 찍을 여유는 없었다. 부부 둘이서 오롯이 체코서 살게 됐을 때, 체스키 크룸로프로 못다 한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곳에 우리 부부가 사진에 들어가면 풍경이 영 ‘아니올시다’가 돼버린다. 셀카봉을 들고 각가지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는 신혼부부, 젊은 연인들을 힐끔힐끔 보면서 풍경 사진들이나 몇 찍다 보니 의외로 그곳 관광이 일찌감치 끝났다.


프라하로 돌아갈 막차 버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뷰포인트인 크룸로프 성 망토 다리 위의 붐비는 관광객들을 피해, 인적이 뜸한 성 바깥의 산길로 무작정 올라갔다.


크룸로프 성.jpg 크룸로프 성에서 내려다본 체스키 크룸로프


결혼 전 연애 시절에는 솟구치는(?) 욕망을 누를 길 없어 어떻게 딴 사람들 눈을 피해 키스라도 한번 해볼까 으슥한 곳을 찾아다녔다. 언젠가 밤에 갔던 서울 삼청공원의 후미진 구석을 낮에 가보니 ‘접근 시 발포’라는 표지가 있는 방공포대 밑임을 알고 아찔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크룸로프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도 없이 유유자적이 사람이 점점 뜸해지는 언덕길을 올라가 보니 세상에나! 예기치 못한 큰 정원과 호수가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크룸로프 성의 성주(城主)가 궁 뒤 산에다 3만 여 평의 정원과 인공 호수를 조성한 거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전혀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성주만이 즐기는 비밀의 정원이었다 한다. 17세기부터 조성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꿔 왔지만 원래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의 정원을 본뜬 것이란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베르사유를 흉내 냈다 하는 데가 많은데, 이곳도 그런 곳 중 하나인 셈이다. 베르사유 정원에 비할 바의 규모는 아니지만, 일단 사람들이 거의 없고 베르사유 정원을 귀엽게 축소해놓은 것이, 오히려 진짜 베르사유보다 바로크 또는 로코코 식 정원의 풍취를 더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청춘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는 말일 테고, 나는 청춘이 암울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별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저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안했던 시절로만 기억된다. 크룸로프 성의 화려한 경관을 등지고 정원에서도 더 깊숙이 들어가 연잎으로 덮인 연못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노는 오리 가족들을 멍 때리며 바라보는 육순 나이의 신혼여행이 느긋하니 좋았다.



정원.jpg 크룸로프 성의 정원(위)과 연못(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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