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공장이 있는 질리나서 별 구경을 못 한 건, 근처 치츠마니(Čičmany) 민속촌을 갔다 왔기 때문이다. 슬로바키아 풍경이 체코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높은 산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스위스서 오스트리아로 달려오던 알프스 산맥이 잠시 멈췄다가, 슬로바키아 북서쪽부터는 다시 카르파티아 산맥이 시작되는데 이 산맥은 동쪽 루마니아까지 간다.
카르파티아를 경계로 체코나 폴란드는 중부유럽이 되고 그 남동쪽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은 동유럽이 된다. 오스만 터키가 유럽을 넘보던 시절, 카르파티아를 넘지는 못하고, 그 이남까지 들어와서 이슬람을 확산시켰다. 발칸이 유럽의 화약고가 되는 먼 원인인 셈이다.
치츠마니 마을은 카르파티아 산맥이 시작되는 산골짜기에 있다. 슬로바키아 여행을 하다보면 치즈마니도 마찬가지이지만 산간서 양을 키우는 풍경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슬로바키아의 전통음식 중에, 만두 모양으로 빚은 감자에 양젖치즈를 듬뿍 얹어 먹는 음식이 있다. 별 맛은 없었던 것 같다. 단 그 겉모습이 터키서 먹었던 양젖 또는 염소젖의 치즈 파스타와 아주 흡사한데 맛은 터키 것이 훨씬 있었다.
치츠마니 민속마을도 원래는 산간서 양을 키우고 살던 마을이다. 마을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현재의 가옥들은 대략 200년 전 지어진 것들로 1921년 대화재 이후 복구된 것이라 한다. 1977년 전통 민속가옥으로 지정되기까지 사람들이 실제 그 집들에서 살았다 하는데, 박물관으로 개조된 이층집에는 자그마치 네 가구가 모여 살았다 한다. 우리나라엔 이런 민속마을들이 도처에 있기에 그렇게 신기하거나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눈이 많이 오는 산간 지역이라(마을 뒤에 스키장이 있다.), 집들이 통나무로 짜이고 경사가 낮은 지붕에 덧창이 달린 것이, 스위스 산간의 샬레 가옥을 연상시켰다. 단 검은색 나무 벽에 흰색 점 또는 기하학적 문양이 배열된 것이 독특한데, 이것이 나무의 부식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 문양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슬로바키아 선수들의 유니폼에 사용됐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낯익은 것 같기도 했다.
박물관 안에는 그곳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재현해놓았는데, 양 목축을 하며 살았기에 양털 실로 자수를 놓은 옷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있었다. 모든 안내문이 슬로바키아어로 써 있고, 해설자는 당연히 슬로바키아 말로 설명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동행한 슬로바키아 지인이 드문드문 영어로 다시 설명을 해줘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안식년을 체코서 보내려고 혼자서 체코어 공부를 좀 했었다. 물론 내게 체코어가 그다지 필요는 없었던 게, 한국학과 체코 교수들은 한국 유학파들로 우리말이 유창했기 때문이다. 단 공산체코 시절 김일성대학으로 연수를 다녀온 내 또래 여선생은 한국어에 그리 능숙하지 않아 나를 만나면 가급적 피하려는 눈치였다. 난 그냥 호기심삼아 체코어를 공부해본 건데 외국어에 재능이 없는 건지 노력이 부족한 건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슬로바키아어는 체코어와 90% 이상 비슷하다는데,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들 중 어떤 것은 체코 말과 사투리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나나 개중엔 아예 어휘가 다른 것들도 있다. 내가 매일 출근하던 동아시아학과 도서실 사서가 슬로바키아 출신의 여인이라는 걸 알고 나서, 어느 날 인사말 등 몇 마디 말들을 슬로바키아 말로 재미삼아 건네 봤다. 마치 경상도 사는 ‘대한외국인’이 그쪽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듯이 말이다.
망외의 소득은 그 사서가 나를 아주 과묵하고 진지한 방문학자로 알았는데, 사실은 명랑쾌활하고 심지어는 촐싹대는 성격의 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내가 체코어를 조금만 더 할 줄 알았어도 내가 얼마나 코믹한 사람인지 그녀가 알았을 텐데, 그걸 그녀가 결국 모르는 상태에서 헤어져야 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