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의 지붕이라 부르는 타트라 산을 가기 위해 그 관문도시인 포프라드(Poprad)에 갔던 시기는 10월 초이지만 도시의 풍경은 완연한 늦가을이었다. 강원도 대관령에 평창이 있고 설악산에 속초가 있듯이 타트라 산에는 포프라드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포프라드는, 2006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이태리의 토리노와 경합을 벌이다가 탈락했다.
기차를 타고 포프라드 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이기도 하지만, 숙소를 정하고 어쩌고 하다 보니 가을의 산간 도시는 금방 어둠이 내리고 시내로 나갔을 때는 아름다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건물은 어둠 속으로 밀려나 앉고 있었다.
인구 5만의 도시니 시내고 뭐고 할 것도 없지만 다운타운의 카페로 나가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타트라 산이 슬로바키아 내 유명한 산악여행과 스키관광지인 데다, 주말이고 보니 포프라드는 유럽의 작은 도시답지 않게 젊은이와 관광객들로 제법 붐볐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곳도 젊은이들이 바글거렸는데 첨엔 그들에게 우리 일행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체코슬로바키아어 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K교수와 여행을 같이 하고 있었다.
K교수는 당연히 슬로바키아 말을 할 줄 아는 데다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라 어느 곳을 가든지 여행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날도 K교수는 카페 안의 젊은이들 심지어 카페서 일하는 여종업원들까지 들었다 놨다 했다. 이곳에서 동양인은 잘 찾아볼 수 없는 데다가, 노년의 동양 남자가 이곳 말을 능숙하게 하며 사람들을 웃기니 카페 안 젊은이들은 재미있어하며 우리에게 술도 권하고 심지어 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고 나도 슬로바키아의 선남선녀들과 뜻하지 않게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유럽의 소도시들이 대체로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흥청대는 카페를 나와 밤이 이슥해지니,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인적이 드물어지며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도심의 방추형으로 된 광장에 늘어선 이삼층의 옛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에 조는 듯 흐느끼듯 서있고 자갈돌 바닥의 거리 위로 수북한 낙엽들은 불빛에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불면 가랑잎들은 정신이 난 듯 부스스하고 떨었다. 12월 들어서면 이 거리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고 그때 다시 거리가 흥청거리게 된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 거리에서는 여수만이 가슴을 저미듯이 밀려들어왔다.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포프라드라는 머나먼 이국땅의 가을 밤거리를 걸어가자니, 늘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 앞에서 역사의 발전 또는 진보를 얘기하고, 군중과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얘기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느닷없이 삶이 낯설어지며 인간은 결국 홀로라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 거리에 있는 지금의 나와 동일한 존재는 없고, 또 이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생애란 결코 두 번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카페 안의 흥청망청했던 분위기와 대조되어 이곳 가을 밤거리로 나오니 여행객이 느끼는 느닷없는 불안함과 고독감이 밀려오면서,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로 슬프게 시작되는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연가곡 중 첫 곡인 ‘밤 인사’의 비장한 곡조마저 불현듯이 귓전을 울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참 간사스럽기 짝이 없다. 따듯한 호텔 숙소로 돌아와 노란 등 아래 하얗고 깨끗한 시트의 침대에 누우니 안온하고 푸근한 마음에 조금 전 쓸쓸했던 감정은 거짓말 같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창밖 너머 포프라드 시의 야경 끝에, 눈이 희끗한 타트라 산을 바라보며 다음 날 그곳으로 갈 기대와 설렘에 즐거운 삶의 욕구만이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