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교 보직을 맡아 일할 때, 업무를 도왔던 행정부서 과장과 해외여행을 같이 갔다 온 적이 있다. 그 양반과 여행 내내 한 방을 같이 써야 했지만, 워낙 예의가 바른 분이라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단지 숙소에서 왜 저 양반은 저리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부스럭거리나 싶었고, 쓰고 난 수건은 왜 저런 식으로 팽개쳐놓나 하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신경이 쓰였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분이 나에게 “처장님(나의 보직 명칭)은 어떻게 여행 오셔서 술 한 잔 안 하십니까?”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저녁식사를 하자마자 숙소로 돌아와 늘 곯아떨어져 잤는데, 그게 아주 못마땅했나 보다. 그날 밤 아차 싶어서 일부러 술집을 함께 가 맥주 한 잔 하고 오면서, 이 양반도 나한테 말 못 할 불만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족과 여행하면 적어도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 큰 애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왜 같이 왔던가 싶어 많이 후회했다. 당시 딸애는 대학에 들어갔고 아들애는 군에서 제대해 복학 대기 중이었다. 행선지는 러시아에서 핀란드와 발트 삼국과 벨라루스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는 것으로, 가족끼리의 첫 자유여행 치고는 다소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뭘 몰라 숙소 같은 것들을 예약을 하지 않고 다녔다. 그나마 러시아에서는 민박 숙소를 정했고, 핀란드에서는 외국인의 우연찮은 도움으로 숙소를 잡았다. 문제는 발트 삼국부터였다. 온라인 예약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애들에게 발트 삼국의 첫 나라인 에스토니아의 숙소를 알아보라고 했다. 애들이 찾아낸 숙소는 체인으로 운영되는 호스텔이었다.
호스텔 대개가 그렇듯이 주방 식당에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한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합석했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우리 애들은 그러는 내가 싫었나 보다. 일단 내가 이상한 영어 발음으로 떠드는 자체가 싫었을 게다. 또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말을 걸어놓고는 동문서답하고 있는 내가 창피했을 것이다.
심지어 애들은 길 찾을 때 내가 누구에게 뭘 물어보는 것도 그렇게 짜증스러워했다. 당시 구글 맵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애들은 그런 걸 갖고 길을 찾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물어보는 게 장땡이라 생각했다. 옛날 군대 있을 때도 촌 아주머니들이 그 먼 전방까지 ‘물어봐’ 독도법으로 부대를 잘만 찾아와 면회하고 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애들과 식당을 정할 때에도 늘 충돌이 있었다. 피자나 파스타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왜 발트 삼국까지 와서 일본 스시를 먹고자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가격은 좀 비싼가! 그런데 애들이 나에게 더 수틀린 것은 내가 여행 경비를 댄다고 유세를 부렸기 때문이다. ‘니들 좋은 부모 만나 운운’ 하면서 말이다. 애들도 여기저기서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그래 니들 아니면 나 스스로 못하랴’면서 발트 삼국의 두 번째 나라인 라트비아의 숙소는 내가 알아봤다. 여행 책자에 소개된 주소를 갖고 찾아갔으나, 그 집은 수개월 전 문을 닫았다. 간신히 근처의 숙소를 찾았는데, 베드 버그(bed bug)에 민감한 아내가 침대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한마디로 오죽잖은 숙소였던 것이다.
그나마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서 아들과 나는 딱 한번 눈을 맞추고 웃었다. 리가는 옛날 한자동맹의 거점도시로 항구 도시답게 흥청거렸다. 리가를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고도 부른다는데, 저녁이 되니 구시가지서 시내로 접어드는 길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졌다.
거리의 삐끼가 나타나더니 나와 아들에게 ‘에로틱 뮤지엄’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런데 곧 우리 사이가 부자관계임을 알아차렸는지, 지 스스로도 멋쩍게 웃고 물러섰다. 아들과 나 역시 서로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럴 때 각자 여행을 왔더라면 못 이기는 척 끌려갔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발트 삼국의 끝 나라인 리투아니아로 이동할 때는 금요일 오후였다. 버스마다 승객이 꽉 차고 교통정체 현상이 빚어지는 것을 보고 여기도 ‘불금’을 위해 발트 삼국의 젊은이들이 서로 간에 많은 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숙소를 정했는데 토요일에는 방이 없었다.
비싼 호텔도 다 만원이었다. 애들한테 다른 방법이 없겠냐며 숙소의 프런트에 부탁을 해보라고 했다. 애들은 방이 없다는데 뭘 다시 물어보냐면서(지당한 말씀이다!), 마치 지들은 숙박과 무관한 제삼자인 양 행동했다. 아들애는 한술 더 떠서 맥도널드 가게가 밤새 영업을 하니 거기서 하룻밤 지내면 된다고 했다.
아니 환갑을 바라보는 지 아버지에게 그게 할 말인가. 할 수 없이 내가 나섰다. 프런트 아가씨에게 인근 숙소의 방을 수배해볼 수 없겠냐는 애절한(?) 부탁을 했다. 아가씨는 몇 군데 전화를 하더니 방이 딱 하나 남은 호스텔이 있으니 얼른 가보라고 했다. 나의 분투로 간신히 숙소를 얻었지만 애들은 일의 감동도 없는 빛이었다.
발트 삼국을 지나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도착했다. 여행하면서 숙소 잡는데 크게 데인 나는 카페 종업원에게 민스크 숙소 사정부터 물었다. 터미널서 가까운 사성 급 호텔인 민스크 호텔을 소개했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금방 삼성 급 호텔로 바꿨다.
그러고는 택시비가 비쌀 테니 버스를 이용해 가라고 일러줬다. 그러나 애들이 하도 인상을 쓰고 있어서 그냥 큰 맘먹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는 5달러를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오잉, 5달러!? 벨라루스가 물가가 싼 나라이기는 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7월 민스크의 밤 역시 더웠는데 무슨 놈의 삼성급 호텔이 냉방이 안 됐다. 아니 아예 에어컨이 안 보였다. 딸에게 프런트에 뭔 조처를 취해줄 것을 부탁해보라 했다. 딸애가 뭐라고 구시렁거렸는데, 나는 결국 여행 막판에 분노 조절 장애가 일면서 호텔 방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에 내가 더 놀랬는데 문이 파손돼 호텔에다 변상을 하는 것 아닌지를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어떤 가족은 여행 때 인천공항에서 함께 출국했지만 입국할 때는 각자들 돌아왔다고 한다. 내 친구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가족과 함께 갔는데 순례는 고사하고 대판 싸움이 벌어져 도중하차하고 돌아왔다. 그 후 자기 혼자서 못다 한 순례 길을 행복하게 다녀왔다고 한다.
어느 정신과 의사 말이, 가족이란 “저마다의 욕망이 얽히고설킨 위험한 화약고”라고 한다. 그러한 화약고를 안고 내 생각대로 여행을 하려 했으니 그게 잘 될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아내는 위선인지 뭔지 가족과 함께 했던 여행이 아주 좋았다면서 기회가 되면 또다시 가고 싶다 했다.
아내가 약간 별스러운 사람이긴 하나, 대개 엄마라는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이 즐거워할 때 오히려 더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를 빼고는 애들과 여행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애들도 마찬가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