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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몇 개의 스케치

by 양문규

1. 호텔 조식 뷔페에서


헬싱키에서는 스칸딕 마르스키(Scandic Marski)라는 우리 형편에 비하면 제법 괜찮은 호텔에서 묵었다. 이 호텔은 스칸디나비아 삼국서 영업을 하는 체인 호텔이란다. 헬싱키 시내가 워낙 작아 다운타운을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은 없지만, 이 호텔은 중앙역 인근의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8층짜리의 모던한 건물이다. 핀란드 특유의 원목 가구들로 꾸며진 실내 시설도 안락했고 호텔 조식에서는 푸짐한 뷔페 음식이 제공됐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식당을 갔을 때 조식 손님임을 확인하는 어떤 직원들도 보이지 않아 다소 신기했다. 이런 식이라면 호텔 투숙객들 아무나 들어와서 먹고 가도 그만 아닌가? 더욱이 식당에는 호텔 안으로 통하는 문도 있지만 호텔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도 있어 그쪽으로도 사람들이 들어와서 먹고 나가니 내가 만일 호텔 주인이라면 당연히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들을 체크할 듯싶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핀란드에서는 사설 경비업체에 보안을 맡길 필요도 없고, 차를 아무 데나 세워 놓아도 안전하며, 또 어느 빌딩을 들어가도 옷걸이가 복도 한쪽에 놓여 있는데 도난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한다. 독일이나 북유럽 나라들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핀란드 사람들의 모습에서 미국식 자본주의도 옛 소비에트 식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미덕을 떠올리게 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헬싱키 건축.jpg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좌), 루터교 성당


2.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헬싱키 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은 아주 현대적인데, 역 바깥으로 나와 역사 건물을 보니 마치 비행기 격납고 같은 ‘바자르’ 모양의 건물이었다. 바자르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시장 등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실제 헬싱키는 서구적인 도시임에도 곳곳에 러시아의 느낌이 나는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양파 형 원형 지붕을 닮은 우스펜스키 성당과, 루터교 성당임에도 정교회 성당을 연상시키는 순백색의 건물과 거대한 녹색 돔은 핀란드의 이웃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음을 새삼 환기시킨다.


아니 러시아는, 단순히 핀란드의 이웃 나라가 아니라 한때 핀란드를 지배했던 나라이다. 의사당(원로원) 광장 한복판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핀란드의 속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핀란드는 러시아와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러시아와 대립하는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핀란드가 가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핀란드는 미국과 서유럽이 러시아와 대결하는 그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화 전략을 취해 나름의 균형 있는 처신을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다.


핀란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나라이듯이, 국제정치에서도 역시 동서의 냉전적 대결 구도를 지양하는 노력을 해온 셈이다. 우리 역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떤 처신을 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헬싱키 카페.jpg 노천카페


3. 여름에도 추운 …


핀란드는 섬나라인 아이슬란드를 빼고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나라다. 이를테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나라다! 그럼에도 헬싱키의 여름은, 노르웨이의 오슬로와 달리 바닷바람은 셀지언정, 삽상하고 쾌청했다.


핀란드만과 발트 해가 마치 내해 같이 둘러싸고 있어서 그렇다 한다. 발트 바다에서 끝나는 에스플라나디 공원의 아름다운 길은 헬싱키를 ‘발트해의 아가씨’라 부르게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7월의 날씨임에도 당시 헬싱키를 여행할 때는 선선함을 넘어 춥기까지 했다. 러시아에서도 별문제 없이 다녔는데 도저히 여름옷을 입고 다니기가 쉽지 않아 가을 스웨터와 바지를 새로이 사 입어야 했다.


카페의 손님들은 모두 길가 자리로 나앉아 따듯한 ‘해 바라기’를 하는데, 길 가는 행인이나 앉아있는 카페 손님이 서로를 구경하는 형국이다. 그나마 이런 여름의 시간도 잠깐 이리라.


괴테가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남부 유럽의 좋은 날씨와 대비되어 북유럽의 자연은 사람들을 강요해서 일하고 예비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런 자연의 작용이 수천 년에 걸쳐 계속되면서, 많은 점에서 북방 민족들의 존경할 만한 성격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이 나라엔 이태리같이 ‘명품’이라 일컫는 고가 럭셔리 브랜드는 없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고 소박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선 노점상.jpg 노점 식당


4. 쿰쿰한 생선들


헬싱키에도 노르웨이의 연어만큼은 아니지만 수산물 요리가 흔하다. 내가 먹어본 음식이야 호텔 뷔페 음식과 노점상의 음식이 다이지만 그중 청어나 오징어 따위의 생선들을 발효시킨 쿰쿰한 맛이 나는 음식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이런 음식은 유럽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는 잘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다.


왕년에 TV에서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에 ‘따루’라는 핀란드 여인이 출연해, 막걸리와 삭힌 홍어 등의 발효음식을 엄청 즐겨 먹는다는 얘기를 흥이 나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여인이 핀란드를 대표하는 건 아니지만 핀란드는 확실히 유럽의 일반 나라들과 조금은 다른 나라인 것 같다.


대학원 다닐 때 국어학 전공을 하는 친구가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드’라는 이가 1939년에 영어로 저술한 <한국어 문법서> 재판 본을 고서점에 두른 기념으로 사준 적이 있다. 정확히는 모르나 핀란드어는 인도유럽어족과 달리 우리와 친연 관계가 있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얘기도 귀동냥으로 들었다.


핀란드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전통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말이 엄연히 있다. 헬싱키 시내 간판의 글들 역시 모두 철저하게 자기네 말로 써져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핀란드 사람들은 영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구사한다.


자기네 말과 영어를 완벽하게 병용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자신들의 문화와 기술을 창조적으로 국제적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저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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