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로 가는 열차가 러시아-핀란드 국경을 넘을 때, 입국 심사를 하던 핀란드 관리가 우리 일행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핀란드서 발트 삼국으로 건너가 벨라루스를 거쳐 러시아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해줬다. 그 관리가 친절한 안내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규정에 따라 얘기를 해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발트 삼국은 EU 국가이기에 무비자로 여행을 하나 벨라루스에서는 입국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일러줬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벨라루스를 여행하려면 소위 통과 비자가 있어야 하는데,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서울에 있는 벨라루스 대사관에서 이를 어렵사리 얻어 왔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 발트 삼국의 첫 나라인 에스토니아는 페리를 타고 발트 바다로 건너가고, 발트 삼국의 세 나라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국경을 넘어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녔다.
그러나 발트 삼국의 마지막 나라 리투아니아를 출발해 벨라루스로 가는 버스를 타면서는 새로이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다소 긴장감을 느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버스 터미널에는 벨라루스 말고도 그보다 더 남쪽인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오데사로 가는 버스들이 눈에 띄어 우리가 참 먼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에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EU에 속해 있어 서로 간 자유롭게 여행이 가능하지만, 19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 여행은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역마차와 비포장도로를 견뎌야 하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탈리아나 독일엔 무수한 왕국이 존재하고 지역이 여러 개로 쪼개져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통행료와 통행증을 제시하는 등 여행 한번 하는 일이 대단히 힘든 일이었나 보다.
그보다 이전인 괴테가 독일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러 갈 때도 다른 왕국이나 제후국들로부터 가끔 첩자로 몰리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자기 나라의 고위 관리나 권세 있는 귀족이 써준 편지 등을 내밀어 위기를 벗어나곤 하는 일화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를테면 그런 편지 등이 지금의 여권 기능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벨라루스를 가는 길에 우리는 당연히 여권도 있고 비자도 있건만 그래도 설렘 플러스 긴장이 있었다.
빌뉴스에서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까지는 버스로 4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데, 국경선은 1시간 30분 지나니 나타났다. 국경에 이르는 길에는 통관절차를 밟는 화물차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져, EU 나라에서 비 EU 나라로 넘어가는 길임을 실감케 했다. 국경에 도착하자 관리가 나타나더니 여권을 모두 걷어 갔으나 곧바로 돌려줬다.
그리고는 하차를 시키더니 짐칸의 짐들을 조사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우리 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짐 조사가 끝나고 나니 좀 떨어진 입국 사무소로 승객들 모두를 끌고 갔다. 여기서도 역시 특별한 일은 없었고 이 입국심사의 가장 주요한 목적인 듯한 1인당 2유로의 의료보험료를 납부하는 것으로 일은 끝났다.
그래도 시간은 꽤 걸렸던 게, 담당 관리가 맘씨는 좋게 생겼으나 느릿느릿 일을 해나갔기 때문이다. 사무실에는 조그만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고 화장실을 두르니 변기에 물도 안 내려가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어 벨라루스의 형편이 어떤지를 짐작케 했다. 작년에도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라 불리는 벨라루스 대통령에 저항하는 벨라루스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우리 언론에서도 지속적으로 보도됐던 것이 생각난다.
입국절차가 모두 끝났음에도, 계속 버스가 떠나지를 못했다. 영문을 모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심 초조했다. 승객들은 마치 우리들 동양인 일행 때문에 차가 떠나지 못하는 양 우리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운전수는 자리를 떴고 버스 에어컨도 작동하지를 않아 실내는 덥고 목도 마르고 상황이 답답했다.
바로 옆 좌석에 모녀가 앉았는데 딸은 초등학생인 듯싶었다. 나는 그 엄마에게 영어를 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엄마가 딸보고 뭐라 하는데 “너 학교에서 영어 배웠잖아, 네가 대신 말해봐” 하는 눈치였다. 소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버스는 한 시간을 떠나지 못하고 있더니 잠시 후 승객들이 모두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쫓아 내리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왜 여기서 내려야 하냐고 반복해 물어봤다.
겨우 한 젊은이가 딱 한 마디 해줬는데 너무도 어이가 없었지만, 후유~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broken!” 아하, 버스가 고장 나 에어컨도 안 들어오고 다음 버스 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 갖고도 긴장을 해야 하는 법이다.
국경을 지나 벨라루스로 들어오니 발트 삼국과는 분위기가 달리 큰 밀밭과 목축지가 나타났다. 20세기 피카소에 버금가는 샤갈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유태인 박해로 프랑스, 미국 등지로 떠돌며,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자신 고향 마을의 농민과 동물들을 환상적이고 동화적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의 고향이 러시아라 하지만 정확히는 이 벨라루스이다.
한편 이 평화로운 들과 농촌의 벨라루스는 이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 군대와 스탈린의 소련 군대가 가장 치열한 공방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수도인 민스크는 완전히 초토화된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 출신의 여성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르포 소설은, 벨라루스 여인들의 눈을 통해,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 터를 그려낸다.
작품 속 한 여인은 전쟁이 끝난 후 몇 년을 피 냄새에 시달린다. 누가 빨간 블라우스를 선물해줬는데 빨간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옷을 입지 못한다. 장 보러 가게도 못 다니는데 더더군다나 정육 코너에서 닭고기를 보면 하얀 게 사람 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전쟁 전까지 음악인 집안에서 자라 특히 독일 음악을 좋아한 한 여성은, 바흐, 베토벤의 이름을 자기 세상에서 지운다. 더 이상 독일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독일의 하이네 시집을 펼쳐들 수 있었다.
어느 곳이나 역사의 슬픔과 고통이 있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해도 이를 고통스럽게 기억해내고자 한다. 샤갈은 삶의 터전이 파괴돼 떠돌아다니는 유태인들의 슬픔을 그의 그림 속에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여러 모티프를 통해 그린다. 알렉시예비치는 히틀러냐 스탈린이냐를 떠나 전쟁을 벌이는 모든 국가 권력들은, 병사가 아닌 여성과 아이들을 희생 삼아 가부장적 남성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이해관계를 실현시키는 것을 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