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지리 시간에, 벨라루스는 소비에트 연방에 속한 ‘백러시아’라는 나라로 배웠다. 백러시아라는 말의 유래를 정확히는 모르나, 기분에 백러시아가 러시아보다 뭔가 더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의 여인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것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느꼈는지 나름 생각해봤다.
민스크의 여인들은 러시아 여인과 같이 그렇게 체격이 크지를 않다. 마치 벨라루스의 이웃나라인 폴란드 여인들과 비슷하게 얼굴이 조붓하며 자그마하다. 그러나 피부는 러시아 여인보다 더 희고, 이목구비는 도렷도렷하다. 러시아의 키다리 미인들이 비현실적인 생각이 드는 미인들이라면, 민스크의 아가씨들은 친근감이 가는 여인들이다.
그리고 민스크의 여인들은 착하고 친절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가씨에게 우리가 가는 곳의 버스 노선을 물어봤다. 아가씨는 몇 번 버스를 타라고 일러줬다. 우리는 버스를 타면서 운전석이 있는 제일 앞쪽으로 승차했다. 그 아가씨도 우리와 같이 탔는데 버스의 맨 끝 쪽으로 탔다.
민스크의 시내버스는 출입문이 세 개로 우리 버스 길이의 한 두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하차할 정류장을 찾느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버스 저 끝에서 잘 보이지도 않던 아가씨가 일부러 우리에게로 달려와서 내릴 정류장을 알려주고 갔다. 나는 우리 가족들 다 팽개치고 그 아가씨를 쫓아서 내리고 싶었다.
비단 아가씨들만 친절한 게 아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남자 종업원에게 민스크의 숙소를 알아봤다. 종업원은 인근의 걸어갈 수 있는 4성 호텔인 민스크 호텔을 추천해줬다. 내가 좀 더 싼 데를 찾으니 3성 호텔인 스푸트니크 호텔을 소개해줬다. 단 거리가 있으니까 택시를 타고 가라고 일러줬다.
카페를 나와 택시 승차장이 있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며 걷는데, 그 종업원이 헐레벌떡 우리 뒤를 쫓아왔다. 택시비가 아무래도 비쌀 것 같으니 버스를 타고 가라면서 노선버스 등을 메모한 종이를 건네주러 달려온 것이다. 아, 어떻게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나? 힘이 들어 결국 택시를 타기는 했다. 택시비는 운전사가 바가지를 씌운 것 같았는데 5달러(?!)였다.
‘유럽 최후의 독재자’가 군림하는 국가라는 오명을 쓴 이 나라의 국민들은 순수하고 착했다. 물론 우리가 낯선 동양인 관광객들이라 더 친절하게 대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당장 소개받은 호텔로 가 방값을 흥정하면서 만난 프런트의 여인은 꽤 퉁명스러웠으니, 사람들의 친절이란 늘 어떤 맥락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벨라루스는 이차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의 대결이 극에 달한, 소위 독소 대치의 중심 무대였다. 벨라루스의 주요 도시들은 양측 군대의 전진과 후퇴가 되풀이되는 전장 터였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독일과 소련 양측의 폭력성이 상승돼가는 과정 속에서 그 희생이 더 컸다.
독일 공군이 민스크에 입성할 때 얼마나 폭격을 해댔는지,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 잦아들 때까지 도시의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이차대전 중 벨라루스 땅에서 대략 총 2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체 인구의 절반이 죽거나 사라진다. 이것은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겪지 못한 비극이었다.
전쟁 통에 민스크는 초토화돼 현재의 민스크는 돌멩이만 남은 상태서 완전히 새롭게 재건됐다고 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민스크는, 러시아나 동유럽의 다른 어둡고 칙칙한 도시들에 비해, 밝고 깨끗한 인상을 준다. 얼마나 쾌적한지 벨라루스 국립대학과 정부청사 건물이 있는 도심의 광장 분수대에서 벌렁 드러누워 한숨 자기까지 했다.
벨라루스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민스크의 물가는 싸서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게는 아주 행복한(?) 곳이었다. 벨라루스 루블은 2013년 기준으로 1 루블에 14원 꼴이었는데, 동전이 아닌 지폐만을 써서 슈퍼마켓의 종업원들은 종일 지폐를 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물론 민스크에도 도심 레스토랑이나 호텔은 꼭 싸다고 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그 밖의 곳에선 부담 없이 사 먹고 다닐 수 있었다. 메뉴판에 벨라루스 말로 쓰여 뭔 요리인지 알지도 못하고 먹었지만, 닭고기와 돼지고기로 된 요리에다 벨라루스 맥주까지 합쳐 4명이 만원 남짓의 음식을 먹었다. 가격도 싸지만, 여행 중 어디서나 먹는 파스타, 햄버거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한 번은 민스크에서 식당 메뉴로 자주 오르는 버섯 요리와 함께 ‘크바스’를 시켰다. 크바스는 러시아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음료수라 한번 먹어보고도 싶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지식인 레빈이 농촌으로 하방(?)하여 너른 들판서 벌초 작업을 하던 중, 농노가 건네주는 크바스를 맛있게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레빈은, 비록 ‘생철통의 녹슨 맛’이 나는 미적지근한 물이지만, 생전에 이처럼 맛난 음료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인들은 이 크바스를 “돼지의 레모네이드”라고 비웃지만, 귀족 레빈은 고된 노동 끝에 마시는 이 크바스를 통해 새로운 삶의 희열을 맛본다. 그러나 나에게 크바스는, 꼭 우리나라의 ‘맥콜’ 맛이 나는 역시 별 볼일 없는 음료수였다.
민스크는 특별히 유명한 랜드마크나 관광지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흔히 남들이 잘 가보지 못하는 도시이기에 좋았다. 상대적으로 별 정보가 없는 곳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분감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아쉬운 건 이곳을 여행하기 위해 얻은 통과비자는 48시간 이상을 체류할 수 없는 비자이기에 황망히 떠나야 했다는 점이다.
입장료가 1달러라고 선전하는 오페라 광고를 보고도 포기하고, 시간에 쫓겨 모스크바행 야간열차를 타야 했다,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을 때 입국심사도 없으니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한 나라라는 느낌이다.
기차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스몰렌스크를 향한다. 바로 국경 옆의 이 도시는, 히틀러의 독일군대도 격전을 치렀지만, 1812년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패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후퇴하며 집결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