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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 지방, 스페인 아저씨들의 멋있는 옷차림

by 양문규

결혼 전 양가 부모의 상견례가 있은 후, 아내가 나에게만 살짝 말해줬는데 장인이 우리 어머니 보고 스페인 여자 같다고 말씀하셨단다. 난 한 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마도 우리 어머니의 이목구비가 크고 부리부리해서 그러셨던 것 같다. 아니면 당신 딸이 애초부터 시어머니 될 사람에게 제압당할 염려 끝에 하신 말씀 인지도 모른다.


장인과는 다르지만 나도 내 나름의 스페인 여자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그건 비제의 오페라에 나오는 여주인공 카르멘의 모습이다. 카르멘은 정확히 말하자면 집시 여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까무잡잡하고 고혹적인 모습의 카르멘이 내가 생각하는 스페인 여자의 이미지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대학 동문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여선생들도 많이 참석한다. 모임 때마다 나는 농담 삼아 여자 동문들의 얼굴 평을 해주곤 하는데, 가령 “알프스 소녀 하이디”같다든지, “안달루시아의 스페인 여인”같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당시 나는 안달루시아가 정확히 스페인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유명한 사라사테의 바이올린 곡들 중에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요를 모티프로 한 소품들이 많은데, 그냥 거기서 듣고 갖다 붙여 말한 것이다. 그 여선생도 안달루시아가 도대체 어디냐고 물어보면서도 일단 스페인 여자라고 하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세비야.jpg 세비야 시내의 아저씨들(좌), 세비야 알카사르 왕궁의 아가씨들


그래서 스페인 여행을 하게 됐을 때는, 여행 중 만날 스페인 여인들에 대한 기대도 컸다. 여행했던 지역은 공교롭게도 세비야에서 시작돼 그라나다, 말라가, 코르도바를 거쳐 가는 스페인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지역인 안달루시아 지방이었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건 아가씨들이 아니라 아저씨들이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지중해가 만나는 ‘네르하’라는 해변 도시를 갔을 때다. 바다의 열풍과 뜨거운 태양 아래 갈색 가슴을 내놓은 반라의 여인은 역시 스페인 여인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간단한 점심을 위해 수제 햄버거 등의 음식을 파는 노천카페를 둘렀는데, 음식 서빙을 하는 웨이터는 은빛 목걸이를 한 나름의 멋쟁이 아저씨였다. 그의 말 놀림은 대단히 경쾌했는데, 경쾌함을 넘어 수다스러울 정도였다.


뭔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햄버거 같은 음식을 서빙하면서 뭔 그런 요란한 말솜씨가 필요한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스페인에서는 누구도 상대방이 말을 마칠 때까지 듣고 기다리지를 않는다 한다. 남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말을 하려 했다가는 평생 한마디도 못할 거란다.


우리 옆에서 식사하던 미국서 온 것 같은 노부부 관광객은 그 웨이터한테 홀딱 빠져 서로들 덕담을 주고받느라고 난리가 아니었다. 웨이터는, 이태리 작곡가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등장하여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아리아를 부르는 ‘피가로’같이도 보였다.


웨이터2.jpg 네하르 노천카페의 웨이터


아주 오래전 파리로 유학을 갔다가 스페인을 여행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은,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오는 기차 안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어찌나 말이 많은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런 걸로 미뤄보건대 스페인 남자들의 특별한 말솜씨는 내 개인의 인상만은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아내도 웨이터의 말솜씨에 놀라 그를 사진에 다 담아 놓았을까!


스페인 아저씨들이 말이 많다는 것은 약간 흉을 보는 측면도 있지만, 그네들이 옷을 멋들어지게 입는 것은 부럽기도 하고 심지어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햄버거 서빙을 하던 웨이터 아저씨야 젊은 축에 속하기에 그렇다 치지만, 나이 좀 지긋한 아저씨, 아니 노인들이 오히려 더 멋있게 입고 다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태양의 해안’이라 부르는 말라가의 해변을 갔을 때, 바닷가를 거니는 나이가 지긋한 배불뚝이 아저씨들의 패션을 보고 스페인이 멋쟁이들의 나라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나의 안목이 옷의 디자인을 따져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냥 하얀색 바지 위로 원색의 남방들을 자연스럽게 걸쳐 입은 것을 보고 어떻게 나이 든 이들이 저런 색깔의 옷들을 선택하여 입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입으면 무슨 카바레 밴드 마스터가 아닐까 싶은데, 스페인에서는 그냥 그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웠다.


말라케타.jpg 말라가의 해안 길


저 화려한 색의 원천은 어디일까? 스페인의 자연 풍광에 새삼 그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하얀 집들. 하얀 집 너머로 작열하는 태양과 원색의 베고니아, 수국, 파초들, 그리고 집 담장과 담장들 사이로 보이는 인디고 풍의 파란색들, 자세히 보면 더 파란 쪽은 바다고, 덜 파란 쪽은 하늘이다.


말라가는 피카소의 고향이기도 하다. 피카소 초기 그림에 많이 사용된 파란색은 그곳의 아름다운 해안을 닮은 것이라 한다. 더불어 그것은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병든 아버지가 있던 고향의 고단한 삶과 슬픈 감정이 드리워진 색이라고도 한다. 스페인 아저씨들의 옷 색깔은 단순한 옷 색깔이 아니라 화가가 풀어놓은 물감 색이었다.


그라나다의 수국.jpg 그라나다 시내의 수국들


프라하에서 일 년을 살았을 때다. 아내가 옷을 사러 가면, 한국에서와는 달리 나도 종종 쫓아갔다. 한국에도 있는 가게지만 나는 거기서 비로소 ‘망고’니 ‘자라’니 하는 옷 가게를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이 스페인 브랜드의 옷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아내는 ‘데시구알’(Desigual)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옷가게도 자주 갔다. 프라하에서는 꽤 인기 있는 가게로 역시 스페인 브랜드의 옷가게였다.


이 데시구알 옷은 스페인 브랜드 옷들 중에서도 유독 디자인이나 색상이 특이했다. 지인 체코 할머니도 언젠가 아내가 입은 데시구알의 옷을 눈이 부시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근데 옷이라는 것 역시 다 맥락이 있나 보다. 한국에 와서 아내가 이 데시구알 옷을 입고 교회를 가는데 무슨 곡마단 피에로가 입은 옷의 느낌이었다. 어, 이 옷이 유럽, 프라하에서는 제법 어울렸는데 …


이런 옷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평생 살면서 옷을 멋있게 입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내 또래 스페인 아저씨들의 옷차림을 보고 즐거워하고 이에 감동할 줄 알면 나도 나름대로 멋있는 사람 아닐까?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에 사는 것이다!


말라카의 커플.jpg 말라가에서 만난 신랑, 신부(좌), 말라가의 피카소 생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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