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의 첫 번째 렌터카 여행은 스페인에서 하게 됐다. 유럽 다른 나라와 달리 스페인에서는 대중교통보다는 차라리 차를 빌려 여행하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아내의 의견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 미국서 안식년을 보내던 시절 렌터카 여행을 한 경험은 있었다.
미국이나 스페인이나 렌터카 시스템이야 다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자동차 종주국인 미국의 시스템에 스페인이 비교될 바는 아니었다. 미국은 그런 점에선 운전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나 같은 초짜도 미국에선 아무런 사고 없이 여행을 하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여행은 세비야 공항에서 시작했다. 공항 터미널에서 이미 차를 예약해놓은 에이비스 렌터카로 갔다. 에이비스 사무원은, 우리가 이미 보험을 들고 왔음에도 자기네 보험을 다시 들라고 했다. 그 이유를 장황히 설명하는데 보험약관이란 원래 한국말로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운지라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고 곧장 차 있는 데로 갔다.
아내는 나보다 운전을 잘한다기보다는 침착하게 하는 편이다. 늘 덤벙대고 주의가 산만한 나를 못 믿어 자기가 먼저 운전대를 잡아보겠다고 했다. 나 보고는 뺑 둘러 가며 차 사진이나 잘 찍어 놓으라고 했다. 차는 흠 하나 없는 거의 완벽한 새 차로 BMW다. 우리 생애에 운전해보는 가장 좋은 차였다.
세비야 공항을 벗어나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부분의 교차로가 로터리(roundabout)로 돼있었다. 한국에서 늘 네 방향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고 운전하던 때와 상황이 크게 달랐다. 게다가 로터리들은 대부분 출구(exit)가 대, 여섯 개 이상으로, 아차 하는 순간 잘못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이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차에 설치했던 내비게이션은 한국 내비에 비하면 굉장히 과묵한 편이다. 하기는 내비가 수다스러웠다면 이를 해석하느라 제대로 운전도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길을 잘못 들어서기만 하면 “리캘큐레이션(recalculation; 재산정)!”하는 짧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왜 이 단어는 그리 격음(거센소리)이 많은지!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이곳서 산타마리아호로 출항하기도 훨씬 전인 12세기, 무슬림에 의해 세워진 오래된 도시로 일단 시내에서 운전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호텔 전용 주차장도 없어 인근의 공영 주차장을 이용해야 했다. 첫날은 아내의 주도로 운전을 무사히 마쳤다.
다음날 산간 지역인 론다 계곡서 그라나다까지는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아내는 해바라기는 거의 다 졌지만 작열하는 태양과 올리브 농장이 펼쳐진 길을 달리면서, 이국적인 스페인의 풍광에 계속 감격해했다. 자기는 스페인 같이 화끈한(?) 여자란다!
그라나다의 구 시가지는 세비야보다 훨씬 더 복잡한 미로로 이뤄져 있는데, 차가 골목으로 진입하니 내비가 작동을 멈춰버렸다. 호텔서 준 약도를 갖고 공영 주차장을 찾느라 골목길을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길가에 설치해놓은 봉을 들이받았다. 큰 사고가 아니었음에도 오른쪽 문짝 2개와 범퍼가 우그러졌다.
아내 역시 놀랐으나, 그래도 사고 현장과 차의 상태를 열심히 사진으로 담고 사고지점의 주소도 확인하는 등 나름 침착히 대처했다. 내가 더 창피했던 건, 아내가 ‘사람이 안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따뜻이 위로해줬기 때문이다. 숫제 바가지로 욕이나 해주지.
여행은 이제 시작이고, 이 차를 끌고 며칠간에 걸쳐 차 반납 장소인 마드리드 공항까지 갈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아내가 스페인에서의 자동차 여행이 자신의 로망이었다고 즐거워하며 떠들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날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인근서 맴돌다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인터넷 상으로 BMW 수리비를 검색해봤는데 어떤 이상한 인간이 그 정도면 기천만원이 들 거라는 글을 올려놨다. 잠이 오겠는가? 제대로 된 보험도 안 들었는데.
이렁저렁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마드리드 공항서 차를 반납하기로 한 바로 전 날이 왔다. 다음날은 포르투갈로 가는 오전 9시 20분 비행기를 타기로 돼있었다. 숙소에서 공항까지 차로 1시간도 채 안 걸리지만 차를 반납해야 할 뿐 아니라, 사고 처리도 해야 하기에 엄청 넉넉하게 아침 6시쯤 숙소서 출발했다.
그 숙소는 야간에는 무인으로 운영돼 아침 그 시간에 나가려면 이중으로 된 주차장 출입문을 스스로 열고 나가야 했다. 그래서 전날 밤에 나가는 연습까지 했다. 차로 여행을 다니려면 즐거움만큼 대가로 치러야 할 일이 많다.
숙소를 나와 마드리드 시내를 잘 빠져나가는가 싶었는데, 차가 지하차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내비가 영락없이 먹통이 돼버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진땀을 빼가며 간신히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느 공항에나 가면 있어야 할 렌터카 이정표가 마드리드 공항에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큰 국제공항도 렌터카를 반납하는 장소만큼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일단 포르투갈 행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제1 여객터미널로 갔는데 역시 렌터카 사무실이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마드리드 공항에는 여객터미널이 자그마치 네 개씩이나 있고 각 터미널 사이 거리도 꽤 됐다. 물어물어 결국 에이비스 사무실이 공항 제일 끝인 제4 터미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그렇게 일찍 숙소를 나왔음에도,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한 시간밖에 안 남아 있었다.
에이비스 사무실에서 제복을 입은 건장한 금발의 스페인 여인이 나타났다. 사고내용을 말하니 인상을 ‘팍’ 쓰면서 차 지붕 위로 훌쩍 올라탔다. 매력적인 건 고사하고 무시무시한 스페인 여인이었다. 매의 눈으로 차를 일별 하더니 지체 없이 2백만 원가량의 견적서를 뽑아줬다.
카드 결제는 안 되고 현금으로 달라한다. 세비야 공항에서 왜 에이비스가 자기네 보험을 들라 말했는지의 이유가 새삼 떠올랐다. 탑승시간은 다가오는데, 그 여인에게 사정해서 현금인출기가 있는 곳을 찾아가 달라했다. 인출기에서는 1회에 300유로밖에 인출이 안 됐다. 5회에 걸쳐 돈을 인출하고서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이미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의 탑승 마감시간은 넘었다. 더욱이 우리가 있는 곳은 제4 터미널인데 제1터미널까지는 공항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가야 했다. 결국 택시를 잡아탔는데 터미널에서 터미널을 이동하는데 자그마치 20유로를 택시비로 냈다.
나는 비행기 표를 손으로 흔들며 보안 수속을 밟고 있는 긴 줄의 여행객 사이를 뚫고 달렸다. 개중엔 이건 뭐야 하면서 가로막는 자들도 있었다. 아내는 물론 힘도 들어 그랬겠지만, 나는 들고뛰는데 천천히 쫓아오며 '사람이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계속 침착하라는 말만 했다.
결국 탑승은 하게 됐고 비행기는 스페인 상공을 올랐다. 아내는 스페인에서 오히려 큰 감동을 받았다며 이곳을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닌 게, 비행기 창문에서 계속 눈을 떼지 못하면서 멀어지는 스페인의 산야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ps. 내가 보험을 든 회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회사인데, 그 회사로부터 반년 후에나 돈을 돌려받았다. 그것도 내 힘으로는 못했다. 아들에게 부탁해 메일도 보내고 직접 전화 연락도 했다. 메일에는 사고 경위서와 아내가 찍어놓은 사진들도 첨부했다.
이후 그 보험회사가 에이비스 쪽으로 송금했고, 에이비스가 나에게 돈을 돌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이제는 차를 빌릴 때 반드시 렌터카 회사가 지정한 가장 고액의 보험을 든다. 이런 경우 사고도 없었거니와, 차를 반납할 때 렌터카 쪽에서 차를 확인하지도 않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