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미국서 안식년을 할 당시, 애들은 모두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그때는 애들이 뭘 특별히 먹을 걸 주장하는 나이는 아니었고 가끔씩 여행하다 햄버거나 하나씩 얹어주면 좋아했다. 그럼에도 애들은 스테이크 식당에는 꽤 가고 싶어들 했다.
시즐러(Sizzler)라든지 하는 스테이크 전문 체인점이 없었던 건 아니나, 미국에 살면서는 그렇게 달러를 쓰는 게 아까워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리가 살았던 도시는 미국 중서부 유타 주의 한 10만 남짓의 인구가 사는 조용한 대학도시였다.
시내라고 해야 손바닥만 한데, 시내를 다니다 보면 언덕 위에 유럽의 궁전 모양으로 지어 놓은 “로이 레스토랑"이라는 음식점이 늘 눈에 띄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건물에 전구 장식을 화려하게 해 놓아 언제 저 음식점에 가서 애들에게 스테이크 한번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마침 자동차보험을 들 때 받아놓은 이 식당 쿠폰이 있어 이곳을 찾게 됐다. 식당은 식탁마다 촛불을 켜놓고 정장한 웨이터들이 서비스를 하는 제법 격식을 갖춘 음식점이었다. 손님들 중엔 잘 차려입은 부부 또는 연인들도 있었다. 웨이터를 불러 스테이크를 시키니까, 친절하게도 우리 식구들 숫자대로 주문하면 너무 양이 많을 것 같으니 세 사람 분만 주문하라고 얘기해줬다.
실제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그 조차도 너무 많아 2인분을 시켰어도 될 양이었다. 먼저 수프로 클램 차우더가 나왔는데 과장을 보태 큰 함지박만 한 그릇에 담아 나왔다. 애들은 그것만 먹고도 배가 불러버렸다. 고기는 큰 빈대떡만 한 사이즈였는데 두껍고 질겼다.
우리 입맛에 안 맞는 건지, 생각보다 엉터리 음식점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누구 말로는 미국서도 진짜 고급 음식점은 스테이크 크기가 작게 나온다고는 한다. 우리 부부는 애들이 남긴 것까지 먹느라 혼났고 애들도 이후 미국에 있을 때만큼은 스테이크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이후 딸애가 커서 대학을 다닐 때 우리 부부와 이태리의 피렌체 여행을 함께 하게 됐다. 그래도 대학생이면 피렌체의 미술을 얘기하면서 폼도 잡을 법도 하건만 고작 그곳을 무대로 한 일본 연애소설 <냉정과 열정>에 대해 몇 마디 하고 나더니, 다음부터는 여행 블로그에 올라와있다는 스테이크 맛집 얘기를 염불 외우듯이 했다. 마치 피렌체는 그것 때문에 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딸애가 이번엔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쏘겠다고 하니 마지못해 쫓아 나서기는 했다. 그런데 하필 이태리 그것도 피렌체까지 와서 왜 스테이크인가 하는 궁금증은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테이크는 당연히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뉴욕 스테이크가 유명하지 않은가? 사정을 알고 보니 스테이크를 미국에 퍼뜨린 장본인 격인 뉴욕 마피아들은 잘 알다시피 이태리 가난한 고장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큰 부자가 된 이후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혀와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식 스테이크가 바다를 건너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뉴욕에서 마피아가 돈을 펑펑 쓰면서 먹던 특별한 음식을,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부자들이 즐겨 먹게 되고, 그 풍요로운 생활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스테이크가 뉴욕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다.
스테이크의 본 고장 이탈리아에서도 이 피렌체가 위치한 토스카나 지방은 특별히 티본스테이크로 유명하다고 한다.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해 르네상스 문명을 꽃피운 메디치 가문의 주인들은 대대로 지병에 시달리는데 병명은 통풍이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이 통풍을, “성가신 악마지만 동시에 귀족적 악마”라 믿어 그 병에 특권적 색깔을 입히기까지 했다.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했던 로렌초 메디치도 중년 이후로는 통풍으로 가마에 실려 다녔다고 한다. 메디치가 사람들의 통풍이 바로 이 기름진 스테이크와 관련이 있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스테이크 맛집을 쫓아가기 망설였던 건 당연히 아니다. 일단 육식을 내켜하지도 않지만 애들이 끌고 가는 맛집에 가서 특별히 맛이 있었던 경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 특히 나라는 인간은 낭만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떤 음식이 설사 맛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면 맛있다는 생각이 싹 사라진다. 거꾸로 가격이 생각했던 것보다 ‘착하면’ 음식 맛이 절로 난다. 이름난 맛집이 가격이 착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맛있게 먹어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당장 피렌체의 전문 스테이크 식당이라는 그 음식점도 스테이크에 새우 하나를 더 올려놓고는 일반 스테이크 가격 몇 배를 올려 받는다. 그런 상술에 넘어가 그걸 시키는 딸이 한심하다 생각했다. 반면 딸애는 이런 나를 한번 사는 인생, 참 쫀쫀하게 사는 한심한 아빠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블로그에 올려 있는 해외의 맛집을 찾아가면 십중팔구 한국인 관광객들이 붐빈다. 줏대 없이 그곳을 쫓아간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한다. 그날도 그 식당에 도착하니 내 또래의 한국인 아저씨가 딸인 듯싶은 아가씨와 이미 스테이크를 먹고 있다가 ‘너도 왔구나!’ 하는 식으로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어떤 여성 피디가 우스갯소리로 섹스와 여행의 유사점들을 들면서, 그중 하나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황홀한 경우가 있을 때도 있고 기대와는 달리 허탈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둘 다 예상대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 경우 기대하고 가는 맛집은 허탈하기 일쑤였다. 우리 같은 음식 아마추어들은 기대 없이 우연히도 운명(?)처럼 맛집을 만나야 한다. 그것이 흔한 일은 아니나 그때 진짜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