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는 집을 짓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집을 짓고 있다. 퇴임하면 학교의 책을 갖다 놓을 방을 마련해준다는 말에 솔깃해 시작했는데, 집 짓고 난 후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옛 어른들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건축 외적인 일을 여기서 왈가왈부할 계제는 아니고, 설계, 토목공사부터 시작해 건축 자재 별로 색상, 디자인 등을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끝도 없이 진행된다. 아내는 이 모든 걸 혼자 결정하기 부담스러우니 나에게 뭘 물어보는데, 나는 도통 그런데 안목이 없다 보니 제대로 된 조언을 못해주고 있다.
심지어 전기조명 업자는 집에 마지막으로 전기조명을 잘해놓지 못하면 여자가 끝에 화장을 제대로 안 한 격이라고까지 얘기해준다. 나는 명색이 인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비판이나 할 줄 알지(아내는 ‘비판’이 아니라 ‘비아냥’이라고 한다.), 건축물에 대한 상상력이나 미적 감수성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빵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이태리를 여행할 때도 그 위대한 건축물, 예술품들을 보면서도 나만의 안목은커녕 기본적인 눈썰미조차 없어, 그저 남들이 얘기하는 걸 듣고 그게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다녔다.
유럽을 여행하게 되면 이태리는 가장 마지막에 가라고 한다. 이태리에서 위대한 건축, 예술품을 다 보고 난 후, 다른 나라로 가면 모든 것들이 싱거워지기 때문이라 한다. 뭐 내 수준에서야 어떤 순서로 보든 마찬가지이지만 막상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런던이나 파리 등의 건축물들은 이태리 것에 비하면 짝퉁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태리 건축, 예술품의 위대함을 얘기할 능력은 안 되고, 대신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일상의 현장에서 본 소품과 디자인 등, 남들이 보면 유치하긴 하지만 내 나름 재미있던 것들을 몇 가지를 얘기해볼까 한다.
로마 못지않게 오래된 도시인 밀라노는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를 이뤄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도 일컫는다. ‘세계 패션의 수도’로도 알려져 있는 만큼, 시의 중심인 두오모 성당 옆 아케이드 거리를 가면 베르사체, 프라다 본점 등 많은 명품 가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명품 가게보다는 그 가게 주위의 길바닥에 주저앉아 사생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갤러리마다 가득 찬 미술작품들을 보면서 과연 이태리는 이태리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거야 또 그렇다 치는데,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오는 가게 쇼윈도에 전시된, 초콜릿이 흘러가는 천칭 모양의 장식물을 보며, 저렇게 소소한 것에서도 조런 깜찍한 멋을 부릴 수 있다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이 사진을 지인들에게 보여주니 “그냥 그릇에 담으면 되지 뭐가 이리 복잡한겨??”하는 이도 있지만, “세련되고 멋지다. 역시 이탈리아!”라고 감탄하는 이도 있었다.
밀라노 어느 서점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나온 입체 그림책 전시도 흥미로웠다. 일종의 ‘팝업 북’, 즉 ‘들춰보기 책(Lift the Flapbook’)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페이지마다 붙어 있는 플랩을 열면 책장에 숨어 있는 각종의 다른 이미지들이 드러난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걸 보긴 했지만 아이디어가 참 다양하고 대단했다.
밀라노에서 기차로 한 1시간 가는 코모 호수를 갔을 때는 겨울 비수기라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간신히 문을 연 식당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여사장 한 사람이 서빙도 하고 요리도 하는 그야말로 조그만 식당인데 음식 맛은 그저 그랬다. 단 주인이 손수 식당 벽에 꾸민 오드리 헵번의 초상이 흥미로웠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나오는 유명한 영화 의상 중 하나인 블랙 미니드레스를 입고 팔만큼 긴 궐련용 파이프를 든 헵번의 사진 초상은 우리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것이다.
주인이 실크스크린인가 하는 수법으로 이를 손수 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헵번 얼굴이 둥둥하고 엉성한데 오히려 그 엉성함이, 주인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 제작해한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 빛나 보였다.
베네치아야 더 말할 나위 없는 도시이지만, 기념품 가게에서 본 현란한 가면들, 무라노 마을의 다소 유치하나 갖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어부의 집들은,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개성 있는 의류를 만들어내는 ‘베네통’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구찌, 페라가모 등 구두와 가죽 제품 등으로 유명한 피렌체에서는 감히 그런 물건들을 살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래도 피렌체는 피렌체인가 보다. 거기서 나는 구두를, 아내는 부츠를 샀다.
그러나 이태리 제품이 아니라 체코 모라비아 지방이 연고지인 ‘바타’의 구두 제품이다. 마침 바타 가게가 피렌체의 명품 가게들 사이에 의연히 자리 잡고 있어서, 가죽과 천으로 된 비교적 싼 가격의 구두를 구입한 것이다. 프라하 살 때는 그 조차 사는 것을 늘 망설였는데, 피렌체의 분위기에 그만 휩싸여 ‘꿩 대신 닭’이라고 일종의 충동구매를 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 있는 피사를 갔던 시기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였나 보다. 숙소에 도착하니 호텔 로비에 조그만 피사의 사탑 모형이 있었고, 산타 여러 명이 그 사탑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별 것 아님에도 이태리 사람들의 귀여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부분이었다. 이걸 보면서 ‘ㅋㅋㅋ’가 절로 나왔다.
이렇게 이런 것 저런 것 다 보고 다녔음에도 그런 것들이 정작 내 집을 짓고 꾸밀 때는 아무 쓸모 짝에도 없는 걸 보면,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은 타고 태어나야 하는 점도 일정 부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