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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여행길서 만난 북한의 여성 감시원

by 양문규

1.

세계에서 젤로 여행하고 싶은 나라를 들라면, 외국은 아니지만 외국보다 더 가기 어려운 북한을 들겠다. 북한을 가보고 싶은 건, 한국 근대문학 전공자로서 비록 식민지 시기였을지언정 분단 직전 우리 작가들의 작품에서 북한의 명소를 인상 깊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린”다는 정지용 시의 ‘장수산’은 ‘황해도 금강산’이라고 부른단다. 이효석 작품 속 ‘주을’ 온천은 경원선을 타고 원산까지 가서, 함경선으로 갈아타 동해안을 끼고 북상하는 중 호젓한 산속에 있는 온천이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2000년 정월 초 이런 꿈을 부분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다. 당시는 강원도 동해항서 크루즈를 타고 휴전선을 피해 공해로 나갔다가 다시 북한의 장전항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여행이었다. 숙박은 배에서 하고 관광 시에만 육지로 올랐다.


장전 부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입국 심사를 받고 대기한 버스를 타고 금강산 초입인 온정리로 간다. 당시 눈이 많이 내려 시계는 불투명했음에도 금강산은 역시 명불허전이라 하늘빛으로 얼어붙은 옥류동 깊은 계곡을 지나 구룡폭포를 향하는 길은 절경이었다.


그러나 금강산의 절경을 보면서도 늘 미진하고 안타까웠던 것은 가끔씩 마주치는 북한 사람들과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제설 작업을 하러 가는 북한의 민간인들과 마주쳤을 때도 눈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부터 당국으로부터 워낙 엄격한 지침들을 전달받았기에 대화를 나눈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생각 같아서는 하루쯤은 인근의 북한 민가로 잠입(?)해서 민박을 하며 따듯한 방에 앉아 밤을 새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2.

금강산 곳곳을 구경하는 길목마다 북한의 감시원(?)들이 두 명씩 짝을 져 지키고 있었다. 들은 말로는 남한 관광객들이 자연환경 또는 김일성의 훈시가 담긴 기념비 암각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감시원들은 남자와 여자, 혹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만 짝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역시 우리들이 하는 행동을 말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을 뿐 어떤 곁도 주지 않았다. 남자 감시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 감시원한테는 뭔가 말을 걸면 받아줄 것도 같았다.


나는 우리 학과 국어학 전공 선생과 늘 짝이 되어 다녔는데, 이 양반이 워낙 산길을 빠르게 타는지라 일행보다 상당히 앞질러 가게 됐다. 감시원 아가씨 둘만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뜻밖에도 그 국어학 선생이 여자 감시원에게 말을 건넸다.


국어학 선생: 실례지만 두 분은 처녀 분들 맞으시죠?

아가씨(1)‧(2): (서로들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네 그렇습니다만?

국어학: 북쪽에서는 처녀 말고 시집간 여자들은 어떻게 부르나요?

아가씨(1):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아이 이름을 쫓아, 아이 이름이 별이면 별이 엄마라고 부릅니다.

국어학: (약간 시치미를 떼며) 아주머니 동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가씨(1)‧(2): (깔깔깔 웃으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가씨(2): 두 분은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선생님들인 것 같습니다만?

국어학: 네, 금강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대학인 강릉대학에서 온 국어 선생입니다.

아가씨(2): 아! 교수 선생님이시군요!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남쪽에서는 ‘임(任)씨’와 ‘림(林)씨’를 구별하지 않고 씁니까?

: ‘림꺽정’을 왜 ‘임꺽정’이라고 부르냐 그 말이죠?

국어학: 음성학적으로 옛 조선시대부터 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두음법칙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 )

나: 두 분은 금강산과 가까운 곳에 있는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석왕사를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가씨(2): 거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 해방 전 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이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장소로 자주 나옵니다.

아가씨(1)‧(2): 호호호

아가씨(1): 강원도에서 오셨다니 저는 거꾸로 강원도 영월을 가보고 싶습니다.

: 영월을 어떻게 아십니까?

아가씨(1): 제가 영월 엄 씨입니다.

: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

아가씨(1): 예 저희 집안 선조입니다.


대화가 바야흐로 무르익어 가고 있는 판인데 우리 쪽 관광객들이 나타나 아쉽게 중단해야만 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북한 여성과의 대화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강산에 파견된 감시원들은 북한서 유수의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라고 한다.


여행 중 이방의 낯선 여인을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여행객의 설레는 로망(?) 중의 하나다. 더욱이 일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북한 현지의 여성이었으니 별 내용도 없었지만 금강산보다는 그이들과의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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