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송의 워싱턴 특파원이 미국 소식을 전할 때 그 배경 화면으로 등장하는 워싱턴 도시의 풍경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 가을 이 도시를 여행했을 때, 은행잎이 날리는 포토맥 강변 워싱턴 디시의 풍경은 내가 가본 미국 도시 중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이 도시서 가진 또 다른 느낌은 미국은 역시 부자나라라는 점이었다. 국회의사당과 워싱턴 기념탑을 잇는 내셔널 몰 양편엔 스미스소니언의 17개 미술관, 박물관이 있는데, 이들 다 공짜 입장이고 공짜치곤 놀랄만한 세계적 보물과 예술적 걸작들이 비치돼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2001년 9‧11 테러 직후라 무료 관람이라는 즐거움이 무색하게, 입장하는 곳마다 가방뿐 아니라, 소지품 일체를 입구의 검색대에 죄다 꺼내놓아야 하는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 그럼에도 관람한 내용들을 돌아볼 때 그러한 불편도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가령 동관과 서관으로 나뉜 국립 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단지 안에서 최대 규모인데, 중세부터 현대의 유럽 미술, 특히 이태리 피렌체 파와 프랑스 인상파의 컬렉션은 세계 제일이라 한다. 이러한 미술품들을 구입할 수 있던 미국의 재력에 놀랄 뿐이다.
우연히 두른 허쉬혼 박물관의 조각 공원에는 로댕의 ‘지옥의 문’, ‘카레의 시민’, 난생처음 보는 피카소의 브론즈로 된 돈키호테와 임신부 조각상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헨리 무어의 펑퍼짐한 인체 조각, 그와는 대조적인 자코메티의 꼬챙이 같은 인체 조각 전시도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문학 전공인 나에게 로댕의 발자크 상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고리오 영감」으로 유명한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 최고의 리얼리스트다. 그럼에도 로댕이 제작한 발자크 조각상은, 발자크를 소설 쓰는 예술가라기보다는 막노동꾼의 모습에 가깝게 만들었다.
실제 발자크는 사업하다 진 빚을 갚기 위해 하루 다섯 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17시간 동안 원고를 썼다고 한다. 이러한 격렬한 노동을 하루 45 잔 커피로 버텼다고도 하는데, 결국 그는 20년 동안 무려 백 권의 소설을 쓰고 51세의 나이에 죽었다.
동맥이 드러난 두툼한 목덜미, 불룩 튀어나온 배에 잠옷 같은 수도복을 걸친 모습은, 빚을 갚고자 전투하듯 글을 쓴 발자크의 고통스러운 영혼이 표현돼있다. 그러나 막상 로댕이 이를 완성했을 때, 비평가와 일반 대중들은 그것이 쓰레기요, 괴물 같다며 모욕적 언사를 퍼부었다.
결국 파리에 그 조각상을 설치하려던 원래 계획이 취소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이 설치를 위한 모금운동을 다시 벌이나, 좌파들과의 연대를 불편해했던 로댕은 모금을 반납하고 결국 이 조각상을 어떠한 공공장소에도 설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 속에서 사업을 벌이다 빚을 지고, 빚을 갚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상업적 신문을 활용해 엄청난 분량의 연재소설들을 써댔다.
사실 소설가 또는 예술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문학이란 자본을 전유하여 세상을 이겨나갈 것인가, 아니면 자본에 매몰된 것인가의 기로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와 같은 장르다.
그래서 말인데 미국은 부자 나라고 영혼은 결여된 나라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워싱턴 디시 미술관서 본 수많은 걸작 예술품을 비롯해 뉴욕이나 보스턴 등에 산재한 유명한 미술관을 가볼 때마다 게오르그 짐멜이 말한 ‘돈과 영혼의 결합’이라는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은 돈으로 예술가를 대접했고, 예술가는 이 돈으로 위대한 예술을 창조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도 돈이라는 수단을 매개로 유산 시민과 교양 시민이 사회와 문화의 장에서 만난다. 자본주의라는 물질문화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정신문화의 물질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