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은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서양 문물도 물밀 듯이 들어온다. 당시 모더니스트 작가들은 서양의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영화, 건축 등 제반의 서양 예술들에 관심을 보이고 그에 대한 선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절친’ 사이이기도 했던 박태원과 이상은 다른 모더니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양 고전음악에 나름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잠깐 내 개인적 얘기를 하자면, 나는 취미라 할 게 딱히 없는 사람이지만, 굳이 하나 들라면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다.
취미생활을 심도 있게 한 것은 아니고, 학교 재직 시 연구실에다 미니 오디오 하나 갖다 놓고 종일 FM 음악방송을 켜놓거나 시디를 즐겨 듣는 정도였다. 지금도 학생들이 나를 기억하는 건, 연구실을 찾아가면 늘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식민지 시기의 작가들을 공부하면서 그들 작품에 서양 고전음악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흥미가 갔다. 물론 이 시기 작가들 대부분은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앞서 얘기한 박태원과 이상의 글에서 그나마 찾아볼 수 있다.
박태원의 『여인성장』(1940)은 통속적 연애소설이기는 하나, 음악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당시는 레코드를 악기점에서 팔았는지 작중 인물이 ‘야마구찌’라는 악기점을 가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베토벤 5번 교향곡 레코드를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소프라노의 독창회를 관람한 얘기도 나온다. 열 장의 표를 떠맡아 음악회에 갔지만, 독창회가 성황을 이룬 건 신문사의 선전 효과 덕분이라 말한다. 소프라노 가수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춘희)’에 나오는 아리아 ’아! 그이였던가?”를 부른다.
박태원은 주로 서양 가곡을 선호한 것 같다. 「여관주인과 여배우」(1942)라는 단편에는 유랑극단 여배우가 바이올린에 맞춰 드리고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장면도 나온다. 이 노래는 당시 유행이었던지 ‘해바라기 시인’ 함형수가 하모니카로도 잘 불렀다는 서정주의 회고가 있다.
박태원이 가장 좋아했던 가곡은 당대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부른 마스네의 엘레지(비가)였던 것 같다. 「피로」(1933)의 룸펜 주인공은, 다방 주인이 자신을 위해 이 엘레지 레코드를 계속 ‘걸어’ 줘 다방에서 장장 7시간을 앉아 이 곡을 12번 이상 들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서 ‘구보’가 좋아하는 노래가 벨칸토 테너 티토 스키파(1888~1965)가 부른 익살스러운 크레올 민요 ‘아이 아이 아이’라는 점이다. 이 곡은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 음악 교과서에 있었는데 한때 나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스키파는 이 노래를 1922년 빅터 레코드사서 녹음했는데 현재 시디로 복각돼 박태원이 들은 똑같은 것을 지금도 들을 수 있다. 박태원 소설은 이 노래 가락처럼 유머러스한 면이 있고 내 성격 역시 그런데, 이런 이유로 그이나 나나 이 곡을 좋아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2.
박태원은 주로 이태리 테너들과 가곡들을 선호했지만, 성격이나 작품이 괴팍했던 이상은 성악곡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다. 아니 수필 따위에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를 지나치듯 언급하는 것 외에 아예 음악 얘기를 하지 않는다.
단 이상이, 보성고 1년 후배인 시인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서양음악 이해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언급이 나온다. 이상은 1937년 동경에 있었고 그해 그곳서 사망하는데, 동경 생활이 외로웠는지 센다이의 동북 제대 영문과를 다니던 김기림에게 편지를 자주 보낸다.
그 편지 중,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먼(1891~1967)이 동경에서 한 공연을 이상이 직접 관람한 감상평이 나온다. 엘먼의 인기는 당시 대단했던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역시 엘먼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발스 센티멘탈’을 감상하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동경 공연에서 엘먼은 랄로의 바이올린 협주곡인 ‘스페인 교향곡’(1874)을 연주했나 보다. 이 곡은, 랄로가 프랑스 작곡가이지만 19세기 유럽의 예술에서 이국풍을 강조하는 유행에 힘입어 스페인 색깔을 강하게 입힌 곡이라 서양의 일반 고전음악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특히 이상이 엘먼의 이 연주를 감명 깊게 언급한 것은 마지막 악장인 론도 부분의 연주다. 론도 형식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엘먼은 이 부분을 연주하면서 상당히 자신의 해석 방식대로 연주를 했나 본데, 이상은 그 ‘데포르마시옹’이 경탄할 만하다고 했다.
이상은 이 곡을 굉장히 좋아했는지, 후버만(1882~1947)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한 것을 동경의 커피 집에서 레코드로 들어보곤, 후버만의 연주가 탐미주의라면 엘먼의 연주는 슬라브적 굵은 선의 정조가 있다며 격찬한다.
지금 세상이 좋아져 엘먼과 후버만이 연주한 스페인 교향곡을 유튜브서 모두 찾아 들을 수 있다. 내가 감상한 바로는, 이상이 엘먼의 연주를 그렇게 감동적으로 들었던 이유가, 공연장에서 연주자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상이 동경 공연장에서 스페인 교향곡을 들은 건 1937년 1월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2월에 사상 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되고, 34일간의 구속을 마치고 석방되지만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사망한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면 스페인 교향곡은 더욱더 비장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