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에서 안식년을 지내고자 준비를 하는 중에, 프라하 카렐 대학의 한국학과장과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다. 한 번은 메일로 프라하에 한국인 교민이 많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체코인 학과장은 다소 냉소적인 투로 한국 교회의 목사와 선교사들이 많이 와있다고 대답해 줬다.
체코는 가톨릭 국가다. 우리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톨릭에 맞서 복음을 전파하러 체코에 간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가톨릭, 개신교를 떠나 유럽 국가들이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고 세속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사람들의 약화된 종교적 영성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리라.
사실 현대 체코인들에게 종교 생활은 그다지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15~17세기 당시 체코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분쟁이 격심했다.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년)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체코 땅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끈 이로 독일의 마르틴 루터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면죄부 판매에 불만을 갖고 부패한 로마 교회를 비판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1415년) 얀 후스라는 체코인이 있다.
프라하의 관광 명소인 올드타운 광장에 가면 광장 중심부에 이 후스의 동상이 있다. 동상 근처에는 중세 때 세운 교회이지만, 후스의 처형 이후 한때 개신교도들의 성소였던 틴(Tynn) 교회가 있다. 창살처럼 곧추 세워진 이 교회는 마치 후스의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후스는 비록 처형당하지만, 농민 등의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후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체코의 귀족 가톨릭 세력과 투쟁하여 종교적 타협을 이뤄낸다. 이후 체코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대세가 된다.
그러나 1617년 유럽각국서 반동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종교분쟁이 다시 점화된다. 당시 체코는 가톨릭국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속국이었는데.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들이 합스부르크서 파견된 가톨릭신자 관리 두 명을 프라하 성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프라하 성 관광 시, 가이드는 이 창문을 가리키며 그때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이 사건이 발단이 돼 유럽 각국은 30년 전쟁에 휘말린다. 전쟁이 끝난 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고 개신교와 가톨릭이 모자이크처럼 뒤섞였던 유럽은 딱딱하고 단단한 국경으로 나뉜다.
이후 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은 하나의 신앙을 믿으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가톨릭 국가에서는 개신교 탄압이, 개신교 국가에서는 가톨릭 박해가 자행된다. 체코는 가톨릭 국가 오스트리아에 완전히 흡수되면서 개신교 세력은 힘을 잃는다.
이에 반해 체코의 후스에 영향을 받았던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작센 지역의 중심도시인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전개된다.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은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체코 보헤미아와 바로 붙어 있었던 독일 작센에서는 어떻게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일까? 작센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독일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도시가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작센은 다시 말해 독일 전역의 정치적 리더였다.
독일의 중요 광산들은 작센지역에 있었는데 여기서 생산된 풍부한 은은 제후들의 주머니를 불린다. 루터의 아버지도 광부 출신으로 나중에 관리직까지 올라간 이다. 루터가 로마 바티칸에 저항하자 바티칸에 불만이 많은 작센 제후들은 루터를 지원하는 든든한 세력이 된다.
후스의 지지 계층이 농민들이었던데 반해, 루터의 지지 기반은 제후와 상공인들이었다. 루터는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루터의 일로 독일 전역이 시끄러워지자 루터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농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긴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걸 목격하고 영주나 국왕의 권위도 우습게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반란을 증오하고, 농민을 미친개와 같이 타살해야 한다며, 심지어 귀족들에게 농민을 학살하면 천당에 갈 것이라고까지 진언한다.
독일 드레스덴에 가면 프라우엔 교회 광장에 루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루터는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을 작사한 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 주가 강한 성이 되기’ 위해서, 루터에게는 제후들의 정치적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