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미국을 가본 건 마흔이 넘어서였다. 사실 미국만 아니라 해외여행을 가본 것이 그때 처음이었다. 한국서 해외여행을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게 1989년 1월 1일부터이니, 70년대 후반 대학 시절을 보낸 나에게 그 이전에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미국으로의 첫 여행은 관광으로 갔던 건 아니고, 하버드 대학의 동양학 연구소인 옌칭 연구소가 소장한 한국문학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기 위해 갔었다. 거창하게 말해 조사이지, 열흘 정도 체류하다 왔으니 구경이나 하다 온 셈이다.
난생처음 하는 미국 여행이라 여러 일화가 있었지만 입국서류를 작성하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여행지 주소에 주(州) 이름을 적는 난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은 매사추세츠 주에 있다. 인디언 토착민의 지명인 매사추세츠의 긴 스펠도 정확히 모르겠거니와 쓰는 칸도 좁았다.
끙끙대고 있는데 유학생인 듯싶은 젊은이가 간단하게 매스(Mass.)라 적으면 된다고 말해줘 다소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버드 대학은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인접 도시인 케임브리지 시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 가본 미국이 하필 매사추세츠였는데, 매사추세츠는 영국서 왕의 탄압을 참지 못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도착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이들은 이곳에 상륙해 정의와 법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약속하는데 후일 이는 미합중국의 이념이 된다.
매사추세츠는 다시 말하자면 미국 정신문화의 발원지로 그 주도인 보스턴은 미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The Spirit of America’라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다.
참고로 매사추세츠 윗동네서 온 뉴햄프셔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그쪽 동네의 관광명소인 큰 바위 얼굴이 그려져 있다. 매사추세츠 출신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1850년)은 뉴햄프셔의 이 바위에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서유견문>을 쓴 개화파 유길준의 유물이 있는 보스턴 근처 세일럼의 피바디 박물관을 구경하러 가다가, 한때 그곳 세관에서 일했던 호손이 살던 집을 지나가며 보았다. 호손 하면 그곳 세일럼 항을 무대로 한 소설 <주홍글자>(1850년)로 유명하다.
<주홍글자>는 1642~1649년, 7년간의 보스턴 식민지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이 도착해 식민지개척을 시작한 지 20여 년 되던 시기다. 당시 청교도 식민지는 종교와 법률을 동일시해, 목사는 그 사회에서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서 옥스퍼드대를 나와 이곳 식민지에 온 딤스데일 목사는, 유부녀 헤스터 프린과 관계를 갖고 사생아를 낳는다. 여인은 평생을 간통죄로 낙인이 찍혀 굴욕의 삶을 살지만, 목사는 이를 숨기고 괴로움 속에 살다가 죽음 직전에 자백하기에 이른다.
목사와 여인은 비록 죄를 범했으나, 이 둘은 봉사와 헌신, 금욕적 생활 등을 통해 속죄받고자 한다. 그러나 보스턴 식민사회는 헤스터의 간통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한다. <주홍글자>는 이런 얘기를 통해 청교도 도덕이 보여주는 율법주의의 성격을 신랄히 공격한다.
호손은 청교도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헤스터 여인과 목사가 보여준 속죄를 위한 봉사와 헌신, 그리고 금욕적 생활 방식은 결국 청교도적 방식으로 청교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답답한 생각이 들게 한다.
단 호손이 모호하게는 그렸으나, 목사와 헤스터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펄을 통해 숲으로 상징되는 야성적이고 이교도적인 대자연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어, 이를 통해 청교도주의와 보스턴 식민지의 문명세계를 비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초기 청교도들이 보여주는 미국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미국 정신의 특징은, 용기, 결단력, 대담성, 낙천주의, 강인한 개인주의 같은 것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대충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그러나 호손이 비판한 미국 정신의 원류로서 청교도주의의 문제점은 인간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규정짓고, 세계를 선과 악으로 이분화하여 청교도가 아닌 이교도들을 악마화한다는 점이다. 세일럼에는 청교도들이 마녀사냥을 한 치욕의 유적지들이 있다.
미국은 개척 정신과 결단력, 불굴의 용기 등으로 세계의 패권 국가가 됐다. 그러나 늘 자국의 가치를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며, 결국엔 모든 세상이 이 가치를 채택하리라는 전제 아래 행동한다는 점이 초기의 청교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자신의 관점을 공유 않는 다른 이들은 전부 틀렸다는 결론을 손쉽게 내린다. 이슬람,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은 ‘악의 축’이라는 말도 있듯이 악마화된다. 그래서 미국의 ‘정신(spirit)’이라는 단어는 가끔 ‘엄격한’, ‘딱딱한’이라는 뜻의 ‘strict’로 착각해 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