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시에는 어디에서든 강이 흐른다. 여행 작가로도 유명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모든 경치에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완전한 평지, 물도 산도 없는 곳에서는 도시가 절대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프라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내를 휘감고 흘러가는 블타바 강은 중세서부터 르네상스‧바로크를 거쳐 로코코에 이르는 옛 건축물들을 더욱더 환상적으로 만들어준다. 강 한편에서는 늘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블타바) 강의 연주가, 강물 흐르듯이 들려온다.
프라하가 지하철 건설을 하면서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데, 고도 프라하에서 블타바 강 위를 달리는 열차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라 하겠다. 블타바 강에는 강뿐만 아니라 네 개의 섬도 있다. 이 섬들은 대개 강안의 다리 계단을 통해 접근한다.
섬 둘레에 둑도 없는 모래섬 그 자체인 스트렐레츠키 섬으로 가서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을 바라보노라면 프라하의 또 다른 풍취를 느끼게 된다. 섬들 중에 가장 큰 섬으로 도심의 일부가 돼 관광객들은 섬인지 조차도 모르고 두르는 캄파 섬도 있다.
캄파 섬엔 강가를 중심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고, 나머지는 공원으로 가꿔져 있는데, 아마도 관광객은 그곳을 다니다가 존 레넌 벽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 캄파 섬 핫 플레이스에 한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가보지 않았을 법한 박물관을 겸한 카페가 하나 있다.
프라하에서 일 년 살았던 나도 체코인 한국학자의 소개로 겨우 알았고 체코를 떠나기 직전 방문해 밤 시간이라 건물의 외관만 구경하고 왔다. 이름 하여 베리슈(Werich) 빌라다. 베리슈는 한때 그 발라에서 살았던 체코 유명 배우의 이름이다.
그런데 베리슈가 살기 전인 2차 대전 중 한국인 고고학자 한흥수라는 이도 그곳에서 살았다. 한흥수는 193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고고학(인류학)을 공부하러 가서 유럽서 12년 정도 살았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지내게 된 나름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이다.
그는 빈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갔지만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에 합병되면서 대학을 옮겨 스위스의 프랑스 쪽 지역인 프리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로는 유럽 각처의 대학 교수들이 망명해 있었다.
한흥수가 공부한 교수들도 그런 셈이었는데, 이들 중엔 ‘알타미라 동굴’ 유물 발굴에 참여한 학자로, 스페인의 프랑코로부터 피신해 스위스로 망명해 온 학자 오버마이어 교수도 있었다. 한흥수는 최고의 성적으로 학위를 받고 1941년부터 비인의 인류사박물관서 일을 한다.
체코는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비인에서 일하던 한흥수는 1942년부터는 프라하의 동양학 연구소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비인과 프라하를 오가며 일하다가 얼마 후 완전히 프라하에 머물며 살게 된다.
그는 1945년 5월 체코가 자국의 빨치산과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나치에서 해방되던 감동의 현장에 있기도 한다. 그가 프라하서 머물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체코가 유럽서 상대적으로 약소국가인 탓에 식민지 조선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체코인 한국학자 말론 그의 학문적 일을 돕던 체코의 독일 여인과의 관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도 알려주긴 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고 어쨌든 그는 프라하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고 그때 그에게 배웠던 학생은 체코의 한국학과를 창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때까지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체코 사람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안지를 알려주는 데 한흥수가 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는 1948년 북한으로 귀국해 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숙청이 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1953년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캄파 섬을 걸으면서, 아주 오래전 피식민지 백성이자 유렵의 이방인 학자로서 한흥수 역시 이 섬을 산책하며 블타바 강변의 아름답고 오래된 옛 건축물들을 보았으리라 생각하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