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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유럽사랑, 함경북도 경성 시절

by 양문규

아내는 국내 여행은 별로지만 유럽 여행은 기회가 닿는 대로 많이 하고 싶다고 한다. 누구는 이를 우리나라 중년 여인들의 허영심이라고 비웃는다.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다. 사실 나도 그런 점에서 좀 허영심이 없지 않아 있다.


아무래도 우리의 근대가 서구 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를 따르다 보니 서구에 대한 선망, 한편으론 그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식민지 시절 이효석은 유럽에 대한 강한 선망을 드러냈고 이를 작품 속에 공공연히 드러낸 대표적 작가 중 하나다.


이효석은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왔다. 졸업 후 그는 중학시절 일본인 은사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다. 책, 잡지 등의 검열이 주된 업무였다. 글 쓰는 그 자신이 일제의 비위에 맞춰 동료 문인들의 글을 검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위로부터 질책을 받고 검열계에는 한 달쯤 다녔을까 해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퇴한다. 이어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농업학교에 영어 교원 자리가 난 것을 기화로 경무국을 사직하고 경성으로 내려간 것이다.


경성은 원래 여진족 땅이었으나, 고려 때 우리 땅이 되고,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국경도시로 있었다. 이효석은 서울도, 평양도 아닌 이런 변방에 가서조차 유럽, 서구를 느끼며 살고 싶어 했다. 일단 그곳 인근에는 유명한 휴양지 주을온천이 있었다.


이 온천은 산중에 있어 이효석은 여름에도 해수욕장보다는 이 온천을 즐겨 이용한다. 그가 특히 이 온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온천서 더 깊이 들어가는 곳에 백계러시아인들 마을이 있고, 여름에는 만주 하얼빈서 피서하러 오는 그들의 별장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면서 러시아 궁정의 귀족과 부자들은 보석만 몸에 감추고 목숨을 피해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들 중 시베리아 쪽으로 피란 온 한 무리가 블라디보스토크서 배를 타고 원산, 청진으로 왔다가 찾은 곳이 이 주을 온천 부근이다.


이효석은 러시아 혁명서 쫓겨 내려온 이들 백계러시아인들을 부르주아라고 비난하기는 한다. 그럼에도 온천장 러시아 미녀의 “창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비쳐 김 오르는 살빛, 젖가슴, 허리, 배, 두 다리 할 것 없이 백설같이 현란하다.”라며 이들을 찬미한다.


하기는 나도 러시아 여행 당시 그쪽 여인들의 비현실적(?)이기 조차 한 몸매에 감탄한 적이 있다. 이효석은 비단 여인들 뿐 아니라 그들 별장촌을 방문하고서는 그들의 운동장과 정구코트, 소형극장, 심지어 식탁 위에 흩어진 빵부스러기, 식은 홍차마저 화제에 올린다.


경성 인근에는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 청진이 있었다. 경성에서 청진까지는 자동차를 대절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날 밤 청진 항구의 극장에서 미국의 혼혈흑인 여가수 조세핀 베이커의 재즈 독창회가 열린다. 이효석은 동료들과 함께 차를 대절해 이를 구경 간다.


아마도 이 여가수는 당시 일본을 거쳐 만주로 가는 공연 여행 중 잠시 청진을 둘렀던 것 같다. 이효석은 이 재즈 가수에 나름 감명을 받은 게, 그녀의 노래가 요란한 문명의 노래가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슬픈 노래이기 때문임을 얘기한다.


흑인 여가수나 백계러시아인이나 유럽, 서구를 느끼게는 하지만 이들 모두 서구의 중심에서는 아웃사이더적인 존재이기에 식민지 지식인인 이효석이 좀 더 공감을 한 것 같다. 이효석은 그날 그 공연을 관람한 후 청진 항구의 밤안개 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효석은 경성에서 10 리 정도 떨어진 나남에도 자기 집 문 앞 같이 자주 드나든다. 기차로 갈 때도 있고 버스로 갈 때도 있는데 어떤 때는 고개를 걸어 넘어 다니기도 한다. 나남에 무엇이 있기에 이효석은 그곳을 그리 드나들었나?


나남에는 당시 일본제국의 육군 19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만주, 조선이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다. 일본이 동해 바다를 건너 만주사변, 중일전쟁의 전쟁터로 가는 일종의 교두보기도 한 곳이다. 군대 경기로 이 도시에는 많은 유흥 시설이 새롭게 지워진다.


이 나남에 가면 앙버터(앙꼬와 버터) 빵집이 있고, 책방이 있고 뭣보다도 이효석이 가장 좋아하는 유일한 커피숍 동(DON)이 있었다. 빵 한 근을 사러 십리 길을 걸어가서는 이곳에서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버스로 고개를 넘다가 가솔린 냄새에 속이 미식거리기도 한다.


북국의 눈송이가 굵어져 동의 창 기슭에 함박 같은 눈송이가 쌓이면 난로 옆에 앉아 진하고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어떤 때는 그곳서 원두 자바를 사다가 집에 와서 끓이면서, 서울서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를 마시는 동무들이 부럽지 않다고 얘기한다.


이효석은 생활뿐 아니라 문학작품서도 유럽 취향, 유럽 중심주의, 또는 유럽적 가치로서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이를 단순히 유럽에 대한 추종, 모방, 콤플렉스라고 보기보다는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근대와 서구를 배척한 일본 전체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효석은 당시 ‘유럽으로의 열린 창’이었던 만주의 국제도시 하얼빈을 여행하면서 일본인들이 “원숭이의 서투른 꼴들”로 서구를 흉내 내는 것을 비웃는다. 이효석의 서구에 대한 짝사랑은 일본 제국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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