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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하라!”

by 양문규

내가 재직했던 국문과에서는 매년 창작수련회라는 행사를 가졌다. 1박 2일의 일정을 잡아서 폐교가 된 시골 분교나 산림휴양지 등을 찾아서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백일장 행사를 갖는 것이다.


단 보통의 백일장과 조금 다른 건, 낮에는 학생들이 시 창작하는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초청한 시인의 강연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어 시인이 직접 학생들의 시를 심사, 강평하고 시상한 후 밤 시간을 이용해 시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흥겨운 술자리를 가졌다.


학생들은 작품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시인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학 창작과 관련한 가르침을 받으니 수업 시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을 하는 셈이다. 나도 학생들 덕분에 제법 많은 시인들을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예술가를 믿지 말고, 예술가가 작품에서 한 이야기만을 믿으라는 말이 있다. 내 경우 막상 시인의 강연을 듣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인에게 실망할 때도 있었다. 물론 실망의 일면엔 시인이 되지 못한 콤플렉스와 그들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점도 조금 인정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시인들의 시를 “신이 들린 상태”라고 말한다. 현대에선 이를 시적 영감과 관련해 긍정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런 광기와 신이 들린 상태는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 넋 빠진 상태로 이성적이지 못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시의 이러한 상태는 전염성조차 있어 다른 사람까지도 그런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데 시인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신이 들리게 해서 사람들의 이성적 생활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본다. 플라톤은 그래서 이상적인 국가에선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국화 옆에서>에서 서정주는 간밤에 왜 그렇게 잠이 안 오고 뒤척였나 싶었더니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화꽃에서 소쩍새 울음소리도 듣고 지난여름의 천둥소리도 듣는다. 플라톤이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할 법도 하다.


요컨대 플라톤은 시가 감정을 조장해 인간의 이성적 생활에 방해를 준다고 했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생활의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억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적절히 표현, 배출해야 한다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나는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쪽의 입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도 아예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우리 학과는 아니고 학교 평생교육원이 주관하는 강연에서 우리나라 문단의 정상급의 위치에 있는 K시인을 초청했다.


K시인은 강연하기에 앞서 와인 한 병을 요청했다. 보통 연사에게 생수를 제공하는 게 관례다. 그 시인이 간단히 술 한 잔 하면서 강연을 부드럽게 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이 양반은 강연을 하면서 와인 한 병을 다 자셨다.


강연이 끝날 때는 다소 만취 상태가 됐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다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게, 나 같은 사람조차도 술에 취하면 상상력이 샘솟듯 하니, 시인은 능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행사가 끝나고 식사 겸 뒤풀이 술자리가 이어졌다. 시인은 점점 엉망으로 취해갔다. 행사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해 준 여인을 굳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 술을 따르라고도 했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그 여인 보고 자기 집까지 동행하자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졸라댔다.


지금 생각하니 이건 ‘미투’ 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당한 경지의 예술가들은 저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들레르는 아편의 힘을 빌려 자연과 ‘매음’을 한다고 하지 않나! 초현실주의자들은 환각제, 음주에 의해서만 작품이 써질 수 있다고 강변한다.


얼마 후 세월이 흘러 K시인은 바로 미투의 대상이 돼 그동안 쌓아온 시적 명성이 일거에 무너졌다. 물론 나는 플라톤이 비난한 시인들의 신들린 상태, 정신 나간 상태가 시적 창조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K시인은 이를 자신의 기행(奇行)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아니 합리화를 넘어서 이를 권력으로 사용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것에 대한 자의식조차도 없어 보였다. 플라톤은 시인들의 이런 상태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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