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경희’, 누가 진짜 신여성?
「경희」와 「노처녀」
나혜석의 단편소설 「경희」(1918년)는 한국 근대소설사에 등장한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의 관점에서 창작된 첫 소설이다. 「경희」는 당시 동경에서 미술 유학을 하고 있던 작가 나혜석의 자전적 소설과도 같은 작품이다.
「경희」는 동경 유학생 ‘경희’가 여름방학 때 일시 귀국해서 집안 식구들과 겪는 일들을 그린다. 그중에서도 중심 사건은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시집을 가라는 아버지와, 이를 거부하고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주장하는 경희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경희」를 발표하던 시기 나혜석의 나이는 23세였다. 미혼이었던 나혜석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노처녀’였다. 소설 속 ‘경희’도 그렇다. 경희의 어머니는 동경에 가서 공부하는 딸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럼에도 “말 만한 처녀”를 일본에 보내놓고 늘 조마조마해한다.
「경희」는 신여성이 처한 여러 곤혹스러운 상황과 고뇌를 그린다. 그러나 이 시기 남성 지식인들은 의외로 이러한 신여성을 혐오하고 이들을 비난하는 데 앞장선다. 「경희」가 씌어지기 직전 발표된 백대진의 「노처녀」(1917년)가 그런 작품이다.
백대진의 「노처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경희’다. 나혜석도 먼저 이 작품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혜석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경희’라고 한 것은 그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노처녀」의 ‘경희’는 학교를 막 졸업한 신여성이다. 경희 어머니는 경희가 멀리 시골로 가서 교사 생활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적당한 혼처가 있을 때까지 집에 데리고 있으려 한다. 경희는 게으르기 짝이 없고 맵시나 부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물어미’같이 부려먹는다.
외출이나 해서 친구들을 만나 “우미관(극장) 구경”이나 다니고, 학교는 졸업했지만 돈 많은 하이칼라 남자를 만나 양옥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일만 공상한다. 어른들이 소개하는 신랑은 안중에도 없다. 한마디로 신여성은 철없고 건방진 것들이다.
철없는 경희지만 백대진은 그녀를, 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학생으로 설정해 놓았다. 이 시기 남성 지식인들은 학교와 사회 등 공적 영역에 새롭게 등장해 잘 나가는 신여성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이들에 대한 거부 또는 혐오 역시 감추질 못한다.
작가는 여학생들을 꾸짖기를, “학교란 무엇을 가르치는지, 매일 꼭두식전에 일어나, 분세수며, 맵시 내는 법만 가르치고 … 학교를 십 년이나 다녀서 매일 잘 배운 것이 향수 바르는 법인가 보더라.”라는 식으로 매도한다.
백대진은 당시 서구의 문학이론을 소개하기도 하고 기자생활도 한 근대적 지식인이다. 단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이다. 이는 비단 백대진뿐만 아니라 이 시기 남성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들은 겉으론 여성의 교육 또는 여권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속으론 여성의 권리와 독립을 늘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신여성 또는 여학생을, 기존의 가부장제가 유지해 온 이분화된 성별 분업의 틀을 해체시킬 수 있는 위험한 계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이러한 당시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경희」를 통해 깨보고자 한다. 그래서 「경희」의 이야기는 이런 장면에서 시작된다. 방학으로 동경서 귀국한 경희는 오라버니댁과 함께 버선을 깁고 재봉틀로 오라버니의 양복 속적삼을 짓는다.
「노처녀」의 경희는 게으르고 밥 하나 지을 줄 모르는 허영에 들뜬 신여성이다. 이에 반해 「경희」의 경희는 집안일에도 성실하고 진지한 인물이다. 도대체 어느 ‘경희’가 그 시대의 신여성을 맞게 그린 것일까?
「경희」의 ‘경희’는, 공부는 이제 그만하고 시집을 가라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친다. 그러나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곧 많은 후회를 한다. 아버지 말에 그냥 순종해 좋은 곳으로 시집 가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다.
그래서 이 때문에 밤새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경희는 배운 여성임에도, 당시 이광수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지식인 주인공들처럼 잰 체하면서 누구를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이들이 신여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귀담아듣는다.
방학 귀국길에는 집안의 여종인 ‘시월’의 애들에게 줄 장난감 선물을 챙겨 돌아온다.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경희의 따듯한 마음 씀씀이가 인상적이다. 그 시대 어디에선가 신여성으로서 치열한 고뇌를 하며 살아갔을 ‘경희’를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