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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불신의 자발적 중단

by 양문규

초등학교 3학년 즈음 집에 텔레비전이 놓였다. 동네에 TV가 있는 집이 거의 없을 때였다.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는 날이면 인근에 살던 큰아버지와 사촌들이 TV로 중계하는 레슬링 시합을 구경하러 왔다.


당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대단했다. 국내파 장영철 선수에 이어 재일동포 역도산의 제자 김일 선수가 등장하면서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레슬링 구경을 하러 온 큰아버지는 식견도 넓고 시니컬한 말도 잘하셨는데, 늘 구경하고 나서는 하시는 말씀이 “저거 다 쇼야!”였다.


여기서 ‘쇼’란 진짜로 하는 게 아니라, 가짜로 짜고 하는 것이란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장영철이 일본선수에게 패하고선 분통을 터뜨리며,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큰아버지는 중계가 있는 날엔 열 일 젖히고 우리 집에 와서 열심히 보고 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쇼는 쇼 같았다. 올림픽 레슬링 경기서 시합하는 것을 보면 선수들이 상대방 선수를 뒤집고 누르고 하는 일 등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프로레슬링에선 그것이 여반장으로 이뤄진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내남 할 것 없이 프로레슬링에 열광했다.


문학비평에서 “불신의 자발적 중단(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이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가 만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순간만큼은 불신을 자발적으로 중단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나 인생관을 기꺼이 중단시킨다. 그리고 작품에서 하는 얘기를 믿고 따른다. 그렇다고 독자가 작품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독자는 불신을 자발적으로 중단시키고 문학이라는 허구에 참여하게 될 때 얻는 나름의 이익을 경험상 알고 있다. 그 이익은 즐거움이기도 하고, 교훈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 둘을 다 아우르는 감동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꺼이 문학이라는 허구(놀이)에 참여하게 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이야기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장돌뱅이 허생원은 일생에 딱 한번 있었던 그날 밤의 일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다. 개울가로 목욕을 하러 갔던 그날 밤 달이 너무 밝고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라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봉평서 제일가는 일색, ‘미스 봉평’ 성서방 집 처녀와 마주친다. 처녀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다음날 어디론가 줄행랑 칠 판이다. 그래서 처녀는 울고 있었다. 처녀가 울 때같이 정을 끌 때도 없다. 이럭저럭 이야기가 돼 허생원은 그날 밤 처녀와 기막힌 인연을 맺는다.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이었던 그날 밤의 인연으로 허생원은 이후 반평생을 두고 봉평장을 빠짐없이 다닌다. 이십 년 후 허생원은 역시 메밀꽃 피는 밤 산 길서 한 장돌뱅이 총각을 만난다. 나귀의 고삐를 잡은 그 총각이 자기와 같이 왼손잡이임을 보고 아들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한 문학평론가는 왼손잡이가 유전을 하냐고 따져 물은 적도 있다. 그러나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고,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면, 이런 어설픈 이야기들 모두를 용서(?)할 수 있다.


자신의 사랑을 한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이도 있는가 하면, 메밀꽃 피는 아름다운 달밤에는 그런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또 무섭고 기막힌 인연으로 갖게 된 아들을 다시 만나게도 되고… 이러한 모든 상황을 독자들은 다 눈감아 주면서 읽는다.


그렇다면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해 독자들은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을 얻는지가 불확실할수록 독자들의 즐거움은 오히려 더 커질 수도 있다. 좋은 작가는 독자 스스로가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의식적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빈틈을 많이 만들어 놓는 자이다.


나는 지역 대학에 근무했던 관계로, 가끔 동창들이 지역 기관장으로 발령받고 와서 만나고 가는 적이 있었다. 그 동창들이 고향에 돌아가서 나를 만나봤다고 얘기하면,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묻는 말이 “걔는 아직도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란다.


맞다! 나는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면서 평생을 실없는 이야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고도 밥 먹고 산 게 용하다. 그래서 수업 당시 학생들이 “불신을 자발적으로 중단”하고 나의 강의를 열심히 재미있게 들어준 것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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