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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an 07. 2024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과 토마스 하디의 <테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인상파 명화들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프랑스 국립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전시작품들이 시작되는 0층에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와 함께 밀레의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 등의 그림이 있다. 


밀레의 그림은 농촌의 풍경을 담고 있어 얼핏 보면 목가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당시 보수 계층에게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비췄다. <이삭 줍는 여인>에서 우리는 허리를 구부려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초라한 모습에만 눈길을 주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여인들 뒤 원경으로 가을걷이한 밀 단이 높이 쌓여있고, 이를 운반하려는 지주의 수레들이 기다리는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농민들이 거둔 풍성한 수확물들은 다 지주에게로 가고, 아낙네들은 추수가 끝난 밭고랑에서 떨어진 이삭을 힘겹게 줍고 있는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의 <만종>(위), <이삭 줍는 여인>(중), 그밖에 <건초 작업장의 휴식> 등 밀레의 그림들


조선 시대 허균의 스승인 이달의 <이삭 줍는 노래>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노래한다. 가을걷이 끝난 밭이랑서 아이들이 이삭을 줍는다. 해가 지도록 주워도 바구니가 차지 않는다. 떨어진 이삭마저 모조리 주워 관청에 갖다 바쳐야 하니 남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를 하소 한다. 


밀레의 그림은 가난한 농민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 가난의 사회적 의미를 묻는 리얼리즘 예술이다! 밀레의 이런 그림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사회의 모순과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19세기 사회의 산물이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1891)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1857)을 소설로 구체화한다. 나는 <테스>를 중학생 때 읽었다. 영국 남서부 웨섹스 지방 가난한 농가 처녀 테스는 곤경에 처한 집안을 구하기 위해 친척뻘 되는 부잣집을 찾았다가 그 집 난봉꾼 아들에게 정절을 잃는다.


이후 목사의 아들로, 순수하나 다소 고지식한 청년의 열렬한 구애로 결혼한다. 테스는 첫날밤에 자신의 실절을 고백했다가 그 청년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이후 그 청년이 다시 테스를 찾으나 테스는 자신의 정조를 빼앗은 그 난봉꾼을 살인하고 사형장으로 향한다.   


중학생 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웨섹스 지방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곳의 황량한 겨울 풍경과 테스의 비극적 삶이 겹쳐져 오랫동안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근자에 <테스>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원래 스토리 자체가 뻔해 큰 기대를 갖고 읽지는 않았다. 


그런데 역시 문학은 유기적 생명체이다. 문학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번에는 테스의 비극보다는 그 비극을 낳게 한 영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작가가 그린 테스의 고단한 노동의 일상이 유독 부각돼 들어왔다.  


테스가 정절을 잃게 되는 주요한 원인은 그녀 집안의 절대적 빈곤 때문이다. 테스의 아버지는 소작조차 부칠 땅이 없어서 말에 의지해 행상 일을 한다. 테스가 어느 날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말을 몰다가 말이 우편마차에 치이는 바람에 그나마 생계조차도 잇기가 어려워진다. 


맏딸인 테스는 집을 떠나 떠돌이 농민으로 여러 농가를 전전하며 품삯 노동을 하게 된다.  테스가 목사 아들에게 버림받고 찾아간 일터가 밀을 수확하는 농장이다. 테스는 그곳에서 탈곡기 기계 발판 위에 서서 일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일은 낟가리 위에 선 이가 넘겨준 밀 단을 하나씩 푸는 일이다. 그러면 밀 단을 기계에 먹이는 남자가 그것을 받아 돌아가는 원통형 바퀴 위에 펼치고, 순식간에 낟알이 털려 나온다. 탈곡기는 쉼 없이 돌아가고 식사하는 동안 삼십 분가량만 멈춰 선다. 


일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테스는 몹시 힘들어한다. 오후는 지루하게 흘러간다. 밀 낟가리는 점점 낮아지고 짚가리는 더 높이 올라가며 밀을 담은 부대들이 짐마차로 실려 나간다. (밀레의 그림 속의 예의 그 짐마차다!) 저녁 여섯 시쯤 되자 낟가리가 어깨 높이 정도가 됐다. 


여인네들의 옷자락이 석양에 물들어 맥 빠진 불꽃처럼 그들의 몸에 매달렸다.(밀레의 <만종>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다!) 테스는 기계 위에 서있기 때문에 기계가 도는 대로 몸을 떨며. 막판에는 의식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팔만 움직인다.        


<테스>가 <그래픽> 지에 연재되던 당시의 삽화


19세기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이라는 동력기는 다양한 종류의 작업 기계와 연결되는데, 농촌에서는 탈곡기계를 탄생시킨다. 테스는 과거의 도리깨 대신, 분업 체계 안에서 기계에 매달려 반복적인 노동을 쉴 틈 없이 해나가야 한다. 


농촌의 기계화가 진행되고 토지 집중이 이뤄지면서 남아도는 노동력이 된 테스와 같은 농촌 처녀들은 살 길을 찾아 런던의 공장을 찾아 고향을 떠나야 했다. 당시 런던에는 마르크스가 망명해 있고, 맨체스터서 방적공장 사장을 하며 그를 돕던 부자 친구 엥겔스가 있었다. 


엥겔스는, 이웃에 사는 소설가 마가레트 하크니스로부터 그녀가 쓴 <도시로 간 처녀(A City Girl)>(1887)의 초고를 읽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소설의 여주인공인 재봉공 넬리는 테스와 같이 농촌서 먹고살 길이 없어서 도시로 가야 했던 처녀다. 


<테스>에서 테스는 자신의 정절을 빼앗은 남자를 살인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설사 테스에게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그녀는 어차피 도시로 갔을 것이고, <도시로 간 처녀>의 넬리와 마찬가지로 그곳서 사생아를 낳고 갓난애를 고아원에 맡기는 비극을 역시 겪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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