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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Apr 28. 2024

뉴욕 로어맨해튼의 ‘바틀비’라는 뉴요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공짜로 구경하는 방법은 맨해튼서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가는 공짜 페리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것이다. 공짜니 만큼 싱겁기 짝이 없는 구경인지라 맨해튼의 배터리 파크 선착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좀 허탈한(?) 마음이었다. 


공짜 페리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자유의 여신상(상), 좌측의 자유의 여신상, 우측의 맨해튼(중), 배터리 파크 선착장이 있는 로어맨해튼


시간도 많이 남아 시골 사람 서울 유람하듯이, 맨해튼 남쪽 끝에서 미드맨해튼에 이르는 즉 로어(lower) 맨해튼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9‧11 사태가 터졌던 그라운드제로까지 걸어보았다. 이곳은 뉴욕의 초고층 마천루 밀림지역이다. 


각종 증권거래소, 은행, 대기업 본사가 들어서며 인기가 오르고, 땅값은 천정부지로 솟으니 건물은 위로 솟을 수밖에 없다. 로어맨해튼은 서울로 치자면 서울 사대문 안인 셈인데 맨해튼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면서도 역동적인 지역으로 맨해튼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층빌딩 사이로 파르테논 신전 모습을 한 연방 홀 건물도 있었다. 뉴욕은 원래 워싱턴디씨가 수도가 되기 전 미국의 수도였는데 이 연방 홀에서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를 낭독했다. 홀 광장에는 조지 워싱턴 동상이 의연히 서있다.

 

이곳에서 몇 블록 가지 않으면 18세기 당시 노예시장이었던 월 스트리트가 있다. 조지 워싱턴과 노예시장! 어째 매칭이 잘 안 된다. 그러나 미국독립 후 국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공화제를 지지했던 조지 워싱턴조차 알고 보면 이미 11세 때부터 노예를 상속받은 노예소유자였다. 


연방 홀과 그 앞의 조지 워싱턴 동상


월가를 지나 월가와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길모퉁이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를 찾아 발걸음을 좀 쉬었다. 교회 묘역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꼽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묘지도 있었다. 월가와 트리니티 교회에 와있으니 멜빌의 <바틀비>(1853)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트리니티 교회와 교회 묘지


허먼 멜빌은 그의 장편소설 <모비 딕>(1851)이 훨씬 유명하다. <모비 딕>이 포경선이 항해하는 망망대해를 무대로 한 소설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틀비>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뉴욕 월스트리트 2층의 사무실을 무대로 한다.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젊은 변호사다. 


그는 사무실에 필요한 필경사 몇 명을 고용하고 있다. 필경사는 법률서류 등을 베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일이 워낙 건조하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일인지라 필경사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신경증적인 인간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바틀비라는 필경사는 독특한 사람이다.


바틀비는 필사 말고는 사무실의 어떤 잡무도 거부하는데 나중에는 필사까지도 거부한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버틴다. 그가 업무지시에 불응하면서 반복적으로 내뱉는 유명한 말이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것이다. 


대체 이런 사무원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싶은데, 바틀비의 이런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고 싶지 않은’ 또는 ‘의미 없는’ 노동에 대한 거부, 즉 노동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밖에 없는 ‘노동의 소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틀비도 바틀비지만, 그를 대하는 주인 변호사의 태도 역시 흥미롭다. 처음에 변호사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그를 가여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체로 그의 행동방식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변호사는 이러한 자신을 양심과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 변호사는 유명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해서 사무실 근처의 트리니티 교회를 찾는다. 도착하니 시간이 좀 일러 잠시 사무실을 둘렀는데, 그곳에서 후줄근한 내복 차림의 바틀비가 나온다. 바틀비는 사무실을 집 삼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변호사는 그날 트리니티 교회를 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고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바틀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바틀비에 대한 자신의 연민이 실효성 있는 구제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타산적인 감정이 엄습한다.


결국은 바틀비를 사무실에서 쫓아내야 하는데 흔히 “질 낮은 것들”이 하는 방식으로 사납게 호통 치며 나가라 하지 않으면서도 기막힌 솜씨를 발휘해 점잖게 쫓아낸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신의 솜씨를 스스로 찬탄해 마지않는다. 결국 바틀비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죽는다.   


브로드웨이를 활보하는 뉴요커들의 생기발랄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소설 마지막에 무정한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하늘거리는 수의에 싸여 누워 있는 바틀비의 창백한 모습! 여행자인 나로서는 변호사나 바틀비 같은 뉴요커들의 다양한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나 짐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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