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공항에 도착하니 벨기에를 홍보하는 밝고 명랑한 포스터 사진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 광고와 오줌싸개 소년 동상, 그리고 동화와도 같은 중세의 도시 브뤼헤를 선전하는 포스터가 그것이었다.
브뤼셀은 밝고 따듯한 도시였다. 공항을 나오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숙소에 내리니 어둠 속에서 걸인 한 명이 다가왔다. 난 애써 못 본 척했는데 택시기사가 주저하지 않고 나한테 받은 돈에서 일부를 걸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오! 브뤼셀! 하는 감탄이 나왔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지만 브뤼셀도 아침, 저녁으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앞에서 쾌활하게 ‘강남스타일’을 부르던 흑인 종업원, 거리를 활보하는 무슬림 차림의 사람들, 벨기에인들 대부분이 친절하며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편견, 차별도 없어 보였다.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서 탈북자들이 그나마 떠돌 수 있던 곳이 벨기에다. 오줌싸개 동상은 생각보다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관광객들은 그 작은 사이즈 앞에서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골목마다 유쾌하게 북적이는 초콜릿과 와플가게들을 지나 그랑플라스 광장에 이르렀다.
벨기에서 망명생활을 한 <레미제라블>의 작가 위고가 경탄한 그 광장은,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은 화려한 건축물들로 뺑 둘러싸여 있다. 이 광장이 웅변하듯,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식민지들로 부강해진 젊은 국가 벨기에는 옛 수도 브뤼셀을 세계적 도시로 탈바꿈시킨다.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다.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간신히 독립을 얻은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의 수완으로 아프리카 대륙서 영국과 프랑스 등의 열강이 충돌을 벌이는 가운데 그 완충지 역할을 할 콩고를 식민지로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국,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해외 식민지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한 벨기에는, 자국의 75배나 되는 큰 땅덩어리 콩고를 갖게 된 것이다. 콩고는 정부가 지배하는 보통의 식민지와는 달리, 레오폴드 2세가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땅과 원주민을 소유한다.
‘콩고 개발업자’나 다름없던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을 콩고의 ‘소유주’라 불렀는데 그는 콩고에서 상아,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그리고 고무 등의 수탈을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강제노동을 거부하는 원주민들에겐 총알을 아끼고자 손목을 잘라내는 잔혹한 행위 등을 벌인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아름다운(?) 일들 몇 가지도 했다. 제국을 꿈꿨던 군주답게 콩고에서 얻어낸 거대한 수익으로 자국에서 과시적인 건축 사업에 몰두한다. 어찌나 건물을 지어댔는지 ‘건축 왕’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히틀러에 맞먹는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됐는데도 벨기에에선 그에 대한 평가가 썩 나쁘지 않다. 건축 왕 덕분에 오늘도 나 같은 관광객들은 브뤼셀에 가서 달콤한 초콜릿과 와플을 사 먹으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감상하는 것이다.
나는 브뤼셀이라는 도시에 반했지만, 조지프 콘래드의 장편 <암흑의 심연>(1899)에는 브뤼셀이 ‘회칠한 무덤’ 같은 도시로 그려진다. 주인공인 영국 선원 ‘말로’는 젊은 시절 동양의 바다들을 휘젓고 다녔음에도 새로 개척되기 시작한 미지의 땅 콩고 강 내륙을 가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브뤼셀로 건너간다. 바로 레오폴드 2세가 경영하는 대기업 회사를 찾아간다. 콩고 강을 운항하는 배의 선장 자리를 얻게 된 말로는 꿈에 부풀어 콩고로 향하나, 거기서 그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유럽 제국주의가 자행하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유럽인들은 콩고에서 상아를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과 교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탄환’으로 이를 약탈하다시피 한다. 반항하는 원주민들의 머리를 말뚝 위에 얹는다. 마치 콩고의 “모든 공기, 모든 땅, 모든 사람들을 삼키려” 하듯이 이들은 무섭게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덤벼든다.
레오폴드 2세는 ‘국제야만풍습억제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약탈을 마치 원주민들을 계몽하고 교화시키는 것으로 미화한다. 그러나 콘래드의 <암흑의 심연>은 유럽의 아프리카 약탈을 고발하면서도 다소 암시적으로 그리고 있어 구체적으로 이를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다.
오히려 어찌 읽으면 콩고의 어둡고 신비한 야만의 밀림 앞에서 전율하는 유럽인의 공포와 호기심을 그리고 있는 소설 같기도 하다. 마치 미국 선교사 그리피스가 조선을 ‘운둔의 나라’라 부르면서, 쇄국과 엘리트의 무능으로 엉망이 된 나라로 바라봤듯이 말이다.
<암흑의 심연>이 브뤼셀이라는 도시를 침울하게 그린 것은 분명하다. 이는 벨기에의 비인간적인 식민지 경영을 연상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증기선의 기적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콩고의 원주민들을, 식인종 운운하면서 은연중 경시하는 유럽인의 태도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