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에 관한 여러 질문
강경애의 「소금」(1934)은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최서해의 「탈출기」(1925)‧「홍염」(1927)도 간도 이주민의 비극적 가난을 그리나, 「소금」이 그만 못지않은 게, 애들과 함께 생존해야 하는 홀어미의 가난을 그렸기 때문이다.
원래 봉염 어미 가족은 팡둥(중국인 지주) 밑에서 소작 일을 하며 조선인 집단부락에 살고 있었다. 이 집단부락은 일제가 재만 조선인들의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봉염 아버지는 어느 날 이 집단부락을 습격한 공산당의 총에 죽는다.
남편이 중국인 지주에 협력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반면 그녀의 아들은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된다. 남편과 아들 모두를 잃은 봉염 어미는 지주의 집에 얹혀살다가 팡둥에게 겁탈당하고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 나 남의 집 헛간에서 애를 출산한다.
봉염 어미는 처음에는 아이를 낳으면 얼른 죽여서 해란강에 띄워 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원수의 애를
낳고서는 아기에게 강한 모성애를 느낀다. 이후 봉염 어미는 호구지책을 위해 봉염과 아기를 떼어 놓고 젖어미(유모) 일을 하러 다니던 중, 두 딸을 모두 잃는다.
봉염 어미는 절규한다. “남의 새끼 키우느라 제 새끼를 죽인단 말이냐 …… 이년들 모두 가면 난 어쩌란 말이야. 날마저 데려가라.” 이후 봉염 어미는 딸들이 염병 걸려 죽었다는 혐의로 유모 자리에서도 쫓겨난다.
그러나 봉염 어미는 죽은 자기 자식들만 아니라 자기가 유모일을 하면서 키웠던 남의 새끼조차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경애의 「소금」을 읽으면,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시 「몰 매기의 노래」도 떠오른다.
‘몰 매기’의 남편은 가난한 어부다. 매기는 하루 종일 청어 공장에 가서 청어를 소금에 저리는 일을 한다. 아기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매기는 달뜨는 밤이 돼서야 일을 마치고 자갈길을 밟아 힘겹게 집에 돌아온다.
일하러 간 낮에는 한 이웃이 아기를 돌봐주고, 일터서 밤늦게 돌아온 매기는 다음날 아침까지 아기를 봐야 했다. 그녀는 지친 몸속에서 불었던 젖을 꺼내 아기에게 물린 채 그만 잠이 들어 버린다. 그리곤 다음날 새벽 품속에서 숨이 막혀 죽은 아기를 안고 있게 된다.
남편은 매기를 친정으로 쫓고, 동네 애들은 애를 죽인 어미라고 그녀에게 돌을 던진다. 봉염 어미나 매기나 모두 비극적인 엄마들이지만, 이들 여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모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모성애라는 것이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모성애는 모범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가령 가난이라는 상황에서 모성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혜석은 모성을 절대시 하고 신비화하는 통념에 대한 부정적 의견과 의문을 표했다. “그렇게 모성이 절대적인 것이고 부모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아들을 중시하고 딸을 천시하는 관습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덧붙여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경험이다.”라고 했다. 애를 좋아한다고 꼭 내가 낳아야만 진정한 사랑을 주는 건 아니다. 봉염네는 젖을 못 주게 된 남의 자식에도 애틋한 마음을 갖는다. 봉염네 이웃여인은, 봉염 어미가 젖어미 일을 할 때 그녀를 대신해 애들을 돌본다.
강경애 소설은 오늘의 모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뭣보다 여성이 가부장적 폭력으로 희생되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사회는 여성들의 상황에 따른 출산과 양육에 대한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모성이 사회적 명령으로 강요되지 않는 사회, 가령 출산과 비출산 사이 선택을 강요하거나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모성·부성·정상가족만이 가족관계의 정답으로 내세우지 않는 사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