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일 년을 지낼 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한인교회를 나갔다. 프라하 교민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어떤 때 예배를 참석하면, 프라하에 놀러 왔다가 주일 예배를 보러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 출석하는 교인 숫자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그날도 예배를 보고 난 후인데 방학을 맞아 프라하 관광을 온 우리 학교 자연과학대학 선생님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고 다음 날은 체코의 다른 도시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도 교회에 온 것을 보니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나 보다.
그분은 당연히 이곳에 익숙하지 않을 테고 또 다음날 떠나야 한다니 반가운 마음에 그날 하루 그 선생님의 관광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섰다. 프라하 성을 가보지 못했다고 해 그곳을 안내했다. 그분이 과학 선생님이라 다른 관광객들이 흔히 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프라하 성을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내가 일부러 택한 길은 천문학자 케플러와 브라헤의 동상이 있는 곳이었다. 그 선생님은 역시 그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체코인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다며 뜻밖이라고 했다. 실제 케플러는 독일인, 브라헤는 덴마크 사람이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유럽국가들 사이에 명확한 국경이 그어져 있지는 않았다. 케플러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천문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루터 교회 성직자를 꿈꾼다. 신학 공부를 미처 마치기 전, 오스트리아 루터교 고등학교의 수학교사 자리가 나서 그곳으로 간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는 골수 가톨릭주의자고 신교 탄압을 강화해 개신교도인 케플러는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궁이 프라하에 있었는데 이곳의 황제 루돌프 2세는 종교를 따지지 않고 과학자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서 덴마크에서 온 당시에는 케플러보다 훨씬 유명한 천문학자 브라헤 밑으로 들어가 그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을 정립한다. 그러나 케플러는 프라하에서도 또다시 쫓겨나는 신세가 되니 프라하가 피비린내 나는 30년 종교전쟁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케플러가 프라하에 있던 시절 이른바 프라하 성 창문 투척사건이 일어난다. 요즘도 여행가이드들은 관광객을 프라하 성 안의 이 현장으로 꼭 데리고 간다. 당시 가톨릭 쪽의 반(反) 종교개혁 움직임이 거세게 일면서 체코 지역의 일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폐쇄된다.
그러자 1618년 프로테스탄트들은, 루돌프 2세에 이어 보헤미아 왕으로 부임한 가톨릭주의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의 관리 두 명을 프라하성에서 창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반종교개혁 정책에 항의한 사건이다.
창밖으로 내던져진 관리들은 죽지 않고 산다. 이를 두고 가톨릭 측은 천사가 붙잡아주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신교도 측은 그들이 푹신한 두엄 더미에 떨어져 살았다고 주장한다. 이 일은 결국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다.
전쟁초기 체코 지역에서 승리한 가톨릭 측은 보헤미아 인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보헤미아는 십 년 만에 완전히 가톨릭 지역이 된다. 체코의 귀족 대다수 역시 영지를 몰수당하고 정치적으로 추방된다. 개신교도 케플러 역시 또다시 체코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의 체코 사람들을 보면, 먼 과거에 신교와 구교로 갈등을 벌이던 종교적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유럽 전체가 그렇겠지만 종교에 냉담한 체코인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곳에 온 한국인 선교사나 한인교회 교인들의 종교적 열기만이 돋보일 뿐이다.
케플러 당시 유럽은 종교를 명분으로 끔찍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라하에서는 케플러나 브라헤, 그리고 이탈리아 피사에서는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신기원적인 과학혁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모순의 시대였나? 아니면 정상의 시대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