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의 쉔부른 궁전을 가면 ‘중국방’이라 부르는 응접실 같은 장소가 있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곳에 중국의 도자기나 가구를 늘어놓고 왕실의 위엄과 안목을 뽐냈다. 유럽은 18세기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 예술에 대한 ‘로망’ 내지 환상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의 풍속화나 정원 등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유럽에 유입된 일본 문화는 유럽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을 흥분시켜 그곳에서 ‘자포니즘(일본풍)’이란 새로운 유파를 등장시킬 정도였다.
오래전부터 유럽이 중국과 일본에 관심을 가져온 데 비해, 중국과 일본 사이에 껴있던 우리는 애초 유럽과의 접촉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체코서 안식년을 지내며 이 책 저책을 들춰보면서, 체코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가 언제부터인지가 궁금했다.
그 시기는 우리가 본격적 근대로 접어들던 시기부터인데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이 그 중요한 계기가 된다. 새로운 세기 들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우리의 지정학적 조건이 체코를 포함한 유럽인들의 인식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단 체코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유럽의 열강들과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띤다. 조선이 근대에 진입하자마자 곧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체코 역시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지라, 체코는 조선에 대해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졌던 듯싶다.
1차 대전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속국이었다. 당시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돼 동맹국의 일원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와 같은 연합국과 싸운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한 체코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꿈꾼다.
체코인들은 이를 위해 전쟁 중 러시아군으로 투항 또는 집단귀순하면서, 총부리를 오스트리아에게로 돌린다. 그 와중에 러시아가 소비에트혁명에 성공하고 종전을 선언하자 러시아로 귀순한 체코 병사들 즉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하 ‘체코군단’)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은 러시아 서부전선을 뚫고 계속 독일과 싸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때 연해주‧만주 등지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은 서유럽으로 떠나려고 그곳에서 주둔 중인 체코군단과 접촉한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일부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게 넘긴다. 이것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체코 군단은 왜 무기를 한국 독립군들에게 넘겼을까?
첫째는 이들에게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한국을 돕고자 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당시 체코군단이 발간한 기관지 『체코슬로바키아 데니크』에는 조선 반도서 일어난 3·1 운동을 주목하여 이를 연속적으로 게재한다.
체코군단의 장군은 상해의 여운형 등 조선독립 운동가들과 약소민족의 해방 운동에 대한 상호 간의 입장을 논의하기도 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가한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러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으로 귀환할 때 그 안전을 돕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이나 독립 운동가들은, 1차 대전이 끝나던 해인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면서, 체코로부터 실질적인 또는 심정적인 지원과 연대를 기대했던 것 같다.
3·1 운동 당시 황해도 진남포의 시위관련자들은 재판 당시 상고이유서에 일본이 1차 대전 당시 독일을 공격해 체코의 독립을 돕지 않았냐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하라고 주장한다. 물론 윤치호 같은 이는 체코는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다면서 이를 부정한다.
체코와 조선은 뜻밖에도 근대의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촉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공산국가가 된 체코는 오랜동안 한국과 교류할 수가 없었다.
체코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자국으로 데려오고 북한에 대한 경제 원조를 활발히 펼친다. 체코인들이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볼 때, 현재 프라하가 한국인들 유럽여행의 핫 플레이스가 된 것을 신기하게만 생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