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할 때 수많은 성당, 궁전들을 만난다. 그때마다 가이드들은 고딕이니,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등등의 건축양식을 설명해 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고딕과 바로크 정도는, 서로 대조적인 특징 때문에 그 모습에 좀 익숙해진다.
프라하는 이 고딕과 바로크 건물들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프라하 시 전체를 조망하는 프라하성의 비투스 대성당은 유럽의 성당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위대한 고딕 건축물로 프라하의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다.
이 대성당을 필두로 프라하 곳곳에 세워진 성탑들과 교회 첨탑들은 프라하를 고색창연하고 신비하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좀 침울한 느낌마저 갖게 해 준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블타바 강변과 시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바로크 건물들은 밝고 화려하다.
프라하가 유럽의 타 도시들과 달리 이런 건물들을 잘 보존한 것은, 세계대전의 포화를 운 좋게 피해 갔기 때문으로 얘기된다. 그러나 고딕과 바로크기 아름답게 공존하는 건, 17세기 이곳이 구교와 신교 세력이 팽팽한 대결을 이뤘던 곳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고딕 성당의 맥과 이어지는 첨탑의 교회들은 루터보다 백 년 앞서 이 지역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얀 후스와 그 후예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듯싶다. 프라하 관광의 허브인 시계탑 광장의, 창살처럼 곧추서 있는 도발적이고 늠름한 쌍둥이 첨탑의 틴 교회가 그렇다.
그러나 그 광장서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인 블타바 강가로 나가면 카를 다리 끝 클레멘티눔 안의 성 살바도르 성당은, 직선이 아닌 덩굴이 감아 올라가는 듯한 육감적인 바로크 양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당 건물이라기보다는 마치 화려한 무대가 설치돼 있는 극장과 같다.
프라하의 이런 교회와 성당들은 과거 그곳에서 극적으로 펼쳐진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갈등의 역사를 반영한다. 프라하는 1618년 시작된 삼십 년 종교전쟁의 진원지다. 이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보헤미아지역의 주도 세력은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나 삼십 년 전쟁서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끈 가톨릭 군에 패배하면서 반종교개혁의 열풍과 함께 바로크 시대가 열린다. 개인의 내면을 중시한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가톨릭은 대중들의 종교적 열정에 직소하는 화려하고 연극적인 바로크 건축을 지향한다.
그래서 프라하의 건물들은 한쪽으론 엄숙하고 침울한가 하면, 또 한쪽으론 육감적이고 에로틱하다. 프라하서
기차로 불과 1시간 거리 밖에 안 되는 독일의 드레스덴은 그곳이 독일 종교개혁의 본산지임에도 18세기 작센 군주의 취향이 반영돼 그냥 화려한 바로크 도시이다.
그렇다고 프라하가 드레스덴에 비해 뛰어나게 아름다운 건축 도시라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프라하는 파리, 비인, 드레스덴 등과 달리 역사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빈티지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그 빈티지 도시가 주는 밝고 어둠의 다양한 편차가 프라하 특유의 문화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내 생각은 또 한 번 비약을 하게 되는데 프라하의 이런 모습들이, 카프카라는 작가가 보헤미아라는 유럽의 변방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세계문학의 거인으로 탄생시키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한다.
카프카의 『성』이나 『심판』 등의 걸작들은 비투스 성당이 있는 프라하 성벽 아래 그의 누이의 집에서 집필된다. 그의 작품들에는 고딕 성당과 유령 같은 숨을 쉬는 프라하성의 엄숙하고 음울한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카프카가 밤새 집필을 끝내고 아침이 되면 누이의 집을 나서 블타바강 건너 프라하 시내 본가로 돌아오면서 마주쳤을 바로크적 화려한 궁전들은 프라하성 또는 고딕의 건물들과 모순돼 보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