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시내 언덕에는 유난히 우뚝 솟은 브라티슬라바성이 있다. 그 성을 올라가면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인다. 다뉴브강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흘러가는데 슬로바키아도 그중 하나다.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강을 따라가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다.
날씨가 맑으면 빈이 보인다고 한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빈까지 60km 정도 떨어져 버스 또는 기차를 이용하면 한 시간 정도면 간다. 브라티슬라바 교민들이 한국을 갈 때는, 빈 공항을 이용해서 갈 정도로 브라티슬라바와 빈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슬로바키아는 오랜 세월 헝가리 또는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었다.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부다페스트가 아닌 브라티슬라바가 헝가리 수도가 되기도 했다. 헝가리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치러져 유서 깊은 도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 도시는 빈이랑 가까워 이곳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여기서 대관식을 치른다. 도시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입김이 곳곳에 서려 있는데 브라티슬라바성의 박물관을 구경하던 중에도 ‘시시’ 황후 부부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한 인기 유튜버 여행가가 빈을 여행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뮤지컬 ‘엘리자베스’의 시시를 현지에서 느껴보고 싶어서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뮤지컬은 못 봤지만 숱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시시의 생애 자체가 대중에게 충분한 관심을 끌리라는 생각을 한다.
시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다. 이 황제가 등극하던 시절 합스부르크는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유럽 최강의 거대 제국이었다. 시시는 막강한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외아들 루돌프는 애인과 동반자살 하고 본인은 암살을 당했다.
남편과의 금슬도 별로였나 보다. 시시에 대해서는 그 진위를 따지기 어려운 너무나 많은 얘기들이 있어 거기에 뭘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단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왕실 사람들 간의 혼인과 애정은, 보통 일반인들의 상식과 사고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아랍속담에 “왕자들 사이에 친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다. 왕가의 혼인이라는 게 대부분 정략적인 것이고 그들의 삶에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문제가 개입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시 왕비도 독일 바이에른 왕가에서 오스트리아 왕가로 시집을 온 여자다.
이 역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른, 프랑스 등 당시 유럽의 복잡한 정치 역학 속에서 이뤄진 혼인일 터이다. 참고로 시시는 그 유명한 ‘백조의 성’을 짓고 우울증으로 자살한 바이에른 왕국의 멋쟁이, 루트비히 왕과 사촌간이다. 둘 사이가 연인 관계였다는 뜬소문도 있다.
초상화의 시시를 보니 그녀가 많은 스캔들에 오를법한 미인으로 보이긴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시작될 때 시시 부부의 대관식이 부다페스트서 열렸다. 당시 리스트가 대관식 미사곡을 연주했는데, 천하의 바람둥이 리스트조차 시시의 외모에 감탄했다고 한다.
시시의 외모가 어떠했든, 혹은 그녀의 삶이 어찌 됐든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슬로바키아 하층부 민중의 삶은 힘들었다. 유럽을 막는 최전방에 있던 슬로바키아는 숱한 전쟁의 무대였다.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중에 몽골, 터키의 침입도 계속됐다.
슬로바키아를 여행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폐허가 된 많은 성들이 이를 방증한다. 한때 유럽의 엘도라도라고 할 수 있던 은광 도시 ‘반스카 슈티아브니차’를 갔다. 거기서 힘들게 채굴된 은들은 모두 빈과 부다페스트로 가 그 도시들의 왕궁을 짓는 재원으로 조달됐다고 한다.
우리는 빈의 유명한 음악가 하이든을 알고 있다. 하이든이 수많은 곡을 작곡하고 날마다 연주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이라는 귀족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가문은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아닌 헝가리 귀족 집안이다.
그러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등에 업고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지역의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최대 지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빈과 부다페스트의 영광은 어찌 보면 슬로바키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 하층부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진 것이다.
시시의 비극적 최후는 왕비 개인의 우연한 일만은 아니리라. 1차 대전을 앞둔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를 알리는 징조였다. 그런데 여러 민족과 문화가 공존한 초민족적 제국이 붕괴한 후, 극심한 민족 간 갈등이 이어져 민중의 고통은 계속되니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