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소설’의 ‘토니오 크뢰거’와 ‘구보씨’

by 양문규

1930년대 중반, 한국 문학에서도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위 ‘소설가 소설’이 등장한다. 소설과 비슷한 장르들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순수한 의미의 소설 장르는 근대 사회에서 태어나 근대사회와 더불어 성장한다.


즉 소설은 근대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물질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는다. 소설가나 예술가는 이러한 돈과 대결하거나, 이를 백안시하는 태도를 갖지만, 그 역시 자신의 작품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래서 소설가,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와 불편한 관계이고 불화를 가질 수밖에 없다. 20세기 초반 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1903)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토니오를 통해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 바깥에 놓여 있고, “문학은 직업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한다.


토니오는 사춘기 중학생 시절의 자신을, 선량한 학생들과 건전한 평범함을 갖췄던 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태만하고 산만한 정신으로 수업 시간을 보내고, 빈둥거리며 시나 쓰고 “방종한” 짓거리를 하는 일종의 ‘루저’ 같은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그가 선망한 친구 ‘한스’는 푸른 눈의 미소년으로 우등생일 뿐 아니라 “승마를 하고 체조도 하며 수영도 잘하는 씩씩한 장부”였다. 토니오가 짝사랑했던 쾌활하지만 오만한 금발의 소녀 잉게보르크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는 행복해하면서도 절망에 빠진다.


이후 소설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토니오는 고향에 돌아와 인근 나라로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던 중, 옛 친구인 한스와 잉게보르크 커플이 선상 무도회에서 춤추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갑자기 사춘기 시절의 괴로운 그리움이 그의 가슴을 고통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자신은 그들을 평생 잊은 적도 없고, 소설가가 돼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결코 그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자신은 그들의 평범한 행복을 사랑하고 찬미하나, 결코 그들에 속하지 못한 ‘길 잃은 시민’ 임을 생각한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본주의 사회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예술가의 숙명을 얘기한다. 예술가란 본질적으로 인생이란 본 무대에서 활동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고독이란 짐을 지고 뒷전에서 창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독일 시민사회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는 공통점도 있지만 각자의 특수성도 가졌을 것이다. 우리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6)에서 「토니오 크뢰거」와 비슷하기도 하나 다소 다른 성격을 가진 소설가의 운명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 구보씨는 소설가가 되려 하지만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소설가다. 그래서 구보씨는 왜 자신은 “글을 쓰지 못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선은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마음이 무거워지며 소설 쓸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계급 소설’을 쓰고도 싶지만 그게 자기 스타일은 아니라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당시 유행인 제임스 조이스 같은 서구의 모더니즘 소설가들에게 눈을 돌려 보는데, 아무 생각 없이 이를 흉내 내는 것도 정답은 아니라 생각한다.


구보씨는 경성 시내를 빈둥거리고 다니며 백화점에서 만난 젊은 부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다방 한구석에 홀로 처박혀 시간을 죽인다. 금광 브로커로 돈을 번 중학 동창이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유흥지로 놀러 가는 걸 보고 불쾌한 생각에 젖기도 한다.


구보씨는 토니오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이러한 속물들 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고독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보씨는 자신이 “고독에 몸을 맡겼다”라고 하지만, 실제론 “고독을 사랑하는 척하며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솔직한 토로를 한다.


구보씨는 마지막에 고독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거리의 방황을 끝내고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후 고독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고 「천변풍경」(1936)에서 시정의 세계로 뛰어 들어간다.


이는 「토니오 크뢰거」에서 소설가는, 저주의 낙인이 찍힌 인간이나, 그렇다고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사랑이 아니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시민들의 삶을 향해 자신을 바쳐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 아닐까? 그것은 소설의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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