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엔 노동자 소설뿐 아니라, 농민소설 또는 농촌소설 역시 활발하게 창작된다. 당시 농민이 전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니, 작가들의 관심은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농민에 더 가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농민소설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는다. 도시에서 출생했고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교육받고 도시에서 일을 해온 사람인지라 농민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라 할 수 있는 농촌과 농민의 현실은 모든 이들의 삶과 떼래야 뗄 수 없고 또 이러한 현실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아내는 농촌 출신이다. 장인은 평생을 농사짓다 돌아가시고, 장모님은 아흔이 넘은 연세에 아직도 텃밭농사를 놓지 못하고 있다. 까닭에 아내는 매주 한 번씩 친정 가서 일을 거들고 온다. 결혼하기도 전의 일인데 설을 쇤 지 얼마 후 아내의 집을 처음으로 놀러 갔던 적이 있다. 들떠서 갔지만, 막상 읍내 장터에서 추운 날씨에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올까 말까 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속마음은 다소 심란했다.
장모님은 나를 쳐다보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분이었고, 장인으로부터는 일장 훈계를 들었다. ‘연애’라는 걸 한답시고 철부지 같이 찾아온 나를 이웃이 볼까 봐 ‘우세스럽다’는 것이 발언 요지였다. 외양간 옆 사랑채에서 처남들과 하룻밤을 잤다. 장인께서, 방바닥 장판이 노글노글해질 정도로 불을 때는데 나는 ‘영창대군’이 되는 줄 알았고, 그래서 ‘스파이더맨’처럼 방벽에 붙어 자야 했다. 새벽엔 거짓말처럼 방이 식으니, 쇠죽을 끓일 겸 방을 다시 덥히려고 아궁이 근처를 서성거리는 장인의 그림자가 방문 창호지에 어룽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 후 나는 처가에 가는 걸 좀 싫어했다. 장인이, 일머리를 좀체 알지 못하는 나를 붙잡고 농사일을 시키며 야단을 치셨기 때문이다. 당신도 민망했는지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농사일도 알아야 되지 않느냐고 해서, 나 역시 계면쩍어 지당한 말씀이라 동의했다. 이 알량한 ‘농촌 실습’ 덕분에, 농민소설을 가르칠 때는 마치 농사를 얼마간 지어본 양 적당히 들러다대 얘기하곤 했다.
식민지 시기의 농민소설 하면 단연 이기영의 「서화」·『고향』(1933) 등을 꼽는다. 이기영은 고향이 충청도 천안 인근이지만, 월북해 북쪽서 문화상을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내가 알기로 그는 남한에서 ‘미해금’ 작가로 남아 있다. 『고향』의 후반부에는 노동자와 연대한 농민들의 소작 투쟁이 등장하여, 이 작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성격이 얘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후반부는 그가 카프 검거사건으로 옥중생활을 하던 중, 누가 대신 써줬다는 말도 있어, 그런 탓인지 내용도 좀 허술하고 전반부와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있다.
오히려 이기영 농민소설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시골이 고향인 학생들은 이기영을 읽으면, 유년시절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풍경이 그대로 재현된다면서 이를 놀라워한다. 『고향』의 여름 들판의 풍경을 보자!
“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논으로 밭으로 헤어졌다. 오후의 태양은 오히려 불비를 퍼붓는 듯이 뜨거운데 이따금 바람이 솔솔 분대야 그것은 화염을 부채질하는 것밖에 안 되었다. 숨이 꽉! 꽉! 막힌다. 논꼬에 괴인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기영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민중 언어다. 농민들은 자연 질서와의 본능적인 교감 같은 것을 갖는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친밀한 상호 교감을 벌이는데, 이로써 그들의 언어는 사실과 경험에 대한 충실성을 갖는다. 가령 생각나는 대로 골라본다면, 『고향』에서, 김매러 가는 농군의 알 백인 장딴지를 “개구리 잡아먹은 뱀”으로, 가뭄의 노란 모 포기를 “시어미 손에 찌들린 며느리” 등으로 비유하는 표현은 실감과 함께 감각적 즐거움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