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전후로 노동소설이 봇물같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대학생들 엠티를 쫓아가 보면, 노동자들의 파업 출정식을 방불케 구호가 담긴 깃발과 함께 민중가요 또는 노동가요 등이 격정적으로 불리어지곤 했다. 8·90년대 많은 노동소설이 등장했지만, 이미 오래전 식민지 시기에도 그와 못잖게 많은 작품이 발표됐다. 그 내용과 수준도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놀라울 정도다. 식민지 시기 많은 노동소설이 등장했다는 것은 실제 많은 공장 노동자가 존재했다는 얘기인데 그 시기가 그랬단 말인가?
1920년대 후반 세계 대공황과 함께 일본의 독점자본들이 식민지 조선으로 진출한다. 이어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일본 경제의 군사화 촉진은 이 땅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급속하게 식민지 공업화를 진행시킨다. 이는 주로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이뤄지는데, 이곳은 과거 ‘동방의 엘도라도’라고 불릴 만큼 풍부한 광물을 매장하고 있었다. 일본 노구치 재벌 등은 개마고원 부근에 장진강, 부전강 수력발전소를 완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수풍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세계 두 번째 규모의 발전소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유명한 노동소설 작가에 북쪽 출신들이 많다. 예컨대 한설야, 이북명과 같은 작가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이들이지만, 해방과 함께 분단이 시작된 상황에서 그냥 북쪽에 남았던 작가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끄는 작가가 ‘이북명’이다. 이유는 그가 전문작가이기에 앞서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작가가 된 자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북명의 소설은 ‘노동소설’이 아닌 ‘공장 소설’로 불렸다. 그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와 그들의 생활을 몸소 체득해 노동자들을 위한 공장 소설을 써보겠다”라고 했는데, “공장은 자신의 작가 수업의 대학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향 함경도에 세워진 노구치 재벌의 흥남 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가 3년간 노동자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많은 노동소설을 써냈다. 산업재해, 여공 성폭력, 인텔리의 위장취업 등 그 소재가 실로 다양하다.
그중엔 이런 얘기도 있다. 「연돌남」(1937), 즉 ‘굴뚝 위의 남자’라는 제목의 작품은, 직공들이 공장 굴뚝 위로 올라가는 술 내기를 했다가,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굴뚝 위에 올라간 이가 시위 혐의를 받아 소요죄로 해고되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고공농성’의 혐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장에서의 이야기보다는 당시 노동자들의 가정사를 그린 작품이 훨씬 짠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가령 「민보의 생활표」(1935)라는 작품에는 노동자 가장인 ‘민보’의 월급과 그 월급이 쓰이는 생활표가 나온다.
3월분 생활표
급료액(26원 75전)
고향(10원), 집세(2원), 쌀값(7원 50전), 식료품(1원), 장작(2원), 전등료(60전), 잡비(1원), 전월 외상(3원 20전) 부족금(55전)
될 수 있는 대로 더 절약할 일
제일 큰돈인 10원은 고향 부모님에게 보내는 돈이다. 이 생활표 어디를 봐도 절약할 데가 없어 보이는데, “될 수 있는 대로 더 절약할 일”이라는 각오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두부 살 돈이 안 돼 비지를 사 먹고, 사냥꾼 총에 맞은 산비둘기를 주워와 고기를 먹게 됐다고 좋아하기도 한다.
매일 잔업으로 솜같이 되어 돌아오는 민보를 아내는 안타까워 하지만, 그나마 경기가 나빠져 잔업이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자 그들 부부는 크게 낙담한다. 민보는 그날 밤 잠든 어린 자식을 보고 아내에게 위로하듯이 말한다. "여보, 저놈의 새끼가 스물다섯 살 먹을 때는 좋은 세상이 올 게요. 모든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세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