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이라도 좋아요

살아야 할 이유

by M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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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코로나 19를 핑계로 취업난을 외쳐대며 집에서 놀고먹고 하는 일상이 갑자기 지겨워졌던 것이다. 벗어나고 싶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리라 각오하고 무엇인가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사색 끝에 곧 서른을 바라보고 영광스러운 무스펙 취준생인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봤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월급쟁이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텐데 이런 수준 낮은 질문으로 그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튜브에 취업하는 법이라고 검색해 보았다.


스크린샷 2020-07-10 오후 3.14.12.png 유튜브 검색 후 보이는 화면. 클릭하고 싶지 않아.

정말 수많은 취업 관련 정보 영상이 쏟아져 나왔다. 인사팀에서 일하고 계시거나 일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의 영상들이 추천 영상으로 화면에 보였다. 썸네일부터 영상 제목까지 클릭을 정말 하고 싶지 않게 생겼네. 클릭을 해서 영상을 하나라도 보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취준의 강에 합류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한숨을 쉬며 유튜브에서 빠져나와서 취업공고 사이트에서 웹서핑을 편안하게 즐기려 했다. 그 많던 양심은 어디 갔는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뻔뻔해져서 대기업 신입 공채부터 확인해보고 공기업 취업 과정을 검색해보았다. 음 뭔가 다 어렵네. 그래도 지원 한 번 해볼까 하고 지원하기 버튼을 눌러서 이력서를 기입하는 브라우저로 넘어갔다. 첫 번째 관문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는데 내 앞길을 바로 막아섰던 것은 바로 정장 입고 찍은 취업 증명사진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다는 것. 헛웃음을 내뱉으며 살포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고 그래도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인턴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서류 제출기한이 24시간 정도 남아있던 UN 소속 기구 중 한 곳에서 인턴을 모집하는 공고를 읽게 되었다. 그래도 과거에 외교관을 꿈꿨었고 국제정치학과 국제법 지식이 아직 머릿속에 따끈따끈 남아있으니 이 기구에 인턴으로 들어가는 일은 마치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순리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레 이 기관에서 원하는 표준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맷을 다운로드했고 이력서 양식을 훑어보았다.


고용노동부에서 권고하는 표준이력서



고용노동부에서 제공하는 양식이라 그런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양식이었다. 내 사진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최종학력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만, 직무 유사경험과 경력 그리고 소유한 자격증 등 은 알고 싶어 하는 듯했다. 정말 놀랍게도 내 직무 유사경험과 경력은 전무했고 소유하고 있는 자격증은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1급 자격밖에 없었다.



비록 내 이력서는 여백의 미를 뽐내지만 자기소개서만큼은 인사담당자의 뇌리에 박히도록 한 편의 소설을 만들어내겠다 다짐을 했고 마감시한에 쫓겨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국제기구의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세울 수 있는 쓸모 있는 재목으로서 국제연합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인턴 후보자 임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대학 입학사정관 자기소개서를 제외하고 처음 써보는 일이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음에도 느낌 가는 대로 일단 썼다. 시간이 있었다면 피드백을 받으며 수정했겠지만 데드라인에 임박해서 별다른 수정 없이 이력서와 자소서를 제출하였다.



방금 쓴 자소설을 보며 이런 자소서를 하루 만에 뚝딱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틀 뒤에 서류 결과 통보해 주고 면접 시간 알려준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면접 보러 갈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서류 제출하자마자 면접 꿀팁을 검색하면서 면접 의상도 사러 갈 계획을 세웠다. 화장실에서는 혼자 거울 보면서 ‘안녕하십니까’를 수십 번 연습했다. 김칫국 한 사발 아주 시원하게 마시면서 행복한 김칫국 대야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서류에서 탈락했다. 제출했던 서류들을 다시 읽어 보는데 앞뒤 문맥도 어색하게 이어져있고 심지어 맞춤법도 많이 틀렸다. 누가 봐도 급하게 준비한 자소서 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일이든 고시공부보다 쉬울 것이라 자만했던 우물 안 개구리는 죽어 마땅했다.




취준의 첫걸음인 서류전형에 처음 도전을 해봤고 그 결과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여전히 나는 제자리에 서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삶이 너무 단조로워 불안한 일상을 한 번 흔들어 놓고 싶을 때 설레발까지 치며 김칫국 한 그릇 하는 것도 어쩌면 인생의 터닝포인트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찐한 김칫국 덕분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소소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취준의 걸음마를 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단계이지만 이렇게 한 발자국 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어디선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내 모습이 현실이 되어 있겠지. 이제부터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한 동안 김칫국을 좀 더 마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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