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졸함의 극치
카페에서 찍어주는 쿠폰이나 포인트를 알뜰히 잘 모으는 편이다. 한 달 지출 비용 중 대부분이 카페에서 쓰는 돈인데 이 비용을 아낄 생각은 없으니 카페에서 주는 혜택이나 잊지 말고 챙겨야 하지 않겠나. 피티샵 근처 갈만한 카페를 찾기 위해 인스타그램 피드를 뒤지다가 인기 카페처럼 보이는 A카페를 발견했다.
인스타 감성 카페 특유의 무거운 철제문을 열고 A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이른 아침에 가서 그런가 (누가 뭐라 해도 이건 백수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 인스타에서 인기 많은 카페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별로 없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지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밝게 해 주시는 사장님이 포스대 앞에 서 있었다. 케이크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디저트들이 깔끔하게 진열돼 있고 메뉴판 글씨체도 읽기 좋게 써져있었다.
포인트를 모아주는 카페라면 계산대 옆에 내 번호를 누를 수 있는 태블릿 PC나 번호 불러달라는 사장님의 요구가 있을 터였다. 음료와 디저트 주문을 하고 체크카드를 내밀고 영수증을 받을 때까지 포인트 적립을 위한 번호를 알려달라는 요구가 없으니 포인트 모으는 카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쿠폰을 달라고 해볼까. 이렇게 인스타 감성이 뿜어져 나오는 카페에서 쿠폰 존재 여부를 물었다가 트렌드에 뒤쳐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또한 이렇게 친절한 사장님이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면 쿠폰은 이 카페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거야 라는 생각에 그냥 조용히 영수증과 체크카드를 돌려받고 등받이 있는 의자와 넓은 테이블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페 내부에 있는 뱅 앤 올룹슨 스피커에서 요즘 힙하다고 여겨지는 팝들이 흘러나왔는데 이 노래들은 독서에 방해가 될 거라 여겨 이어폰을 끼고 책을 읽었다.
피크시간을 제외한 평일 아침과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는 A카페에 첫 방문 이후 여러 차례 더 가서 커피를 마시며 독서와 웹서핑을 했다.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하는 단골손님으로 얼굴도장이 찍혀서 카페 사장님은 내 주문까지 외울 정도였다. 브라우니에 올라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양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들어가는 얼음의 양과 같은 디테일한 주문 사항까지 알고 있었다.
이 카페에 내 보금자리 같은 애정이 생기려고 하던 때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유 없이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카페 입구를 응시했다. 크고 무거운 문이 열리고 사원증을 목에 건 손님 3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요란스러운 웃음과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을 주문을 할 거라고 포스대에 도착하기 전부터 큰소리로 대화했다.
-저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세잔 주세요. 아, 그리고 쿠폰 이거 합쳐주세요.
쿠폰? 쿠폰이라는 단어가 내 귓바퀴를 강하게 울렸다. 아팠던 머리가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 카페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그 음료 도장 쿠폰?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고 계산대를 쳐다봤다. 회사원 손님은 얇은 종이 2장을 사장님에게 내밀었고 사장님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얇은 종이에 도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체내 마그네슘 결핍이 만연한 듯 왼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친절한 사장이라면 선량한 손님에게 쿠폰을 마땅히 제공하리라 믿어왔던 시간에 대한 배신이다. 순간 단골손님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떠올렸다. 단골손님에게 쿠폰의 존재를 알리지 않음으로써 단골손님의 사전적 정의를 철저하게 무시한 사장님의 언행은 나를 포함한 여러 단골손님에 대한 기만적 행위였다.
쇠숟가락으로 머리통을 가격 당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읽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카페에 음료 도장쿠폰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확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음 손님 주문 과정도 유심히 쳐다봤다.
-쿠폰 찍어드릴까요?
항상 카페에서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못 들었던 단어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쿠폰이라는 두 음절로 이루어진 한 단어.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이 음료를 주문할 때 물물교환 하듯 쿠폰을 내고 도장을 받아갔다.
많은 물음표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8번 넘게 방문하고 있는 손님에게 쿠폰을 제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음료 쿠폰이 이틀 전에 새로 생겼을 수도 있고 12시 이전에 방문하는 손님에게는 쿠폰을 찍어주지 않는 카페 규칙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수도 있다. 질문의 답을 제일 빠르게 알아내는 방법은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점원에게 묻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하기 전에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뒤죽박죽 엉킨 내 감정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도 정리되지 않았다. 신뢰했던 카페 사장님에게 느낀 배신감 때문에 혹은 어쩌면 8개의 음료 도장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함으로 인해 우울한 감정이 드는 걸 지도 모른다. 8개 스탬프가 뭐라고! 권리를 빼앗기고 차별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는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가서 물어봐야지. 이번 기회에 쿠폰을 받게 된다면 화난 기분이 사그라들 것 같았다.
바싹 마른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 내 소지품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셨던 커피 컵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컵을 반납하면서 해맑은 표정으로 카페 쿠폰이 있냐고 공손하게 물어봤다. 카페 사장님은 차분하게 네 있어요.라고 답하면서 처음 보는 손님에게 전달하듯 명함 크기의 쿠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쿠폰을 받아 들고 감사인사를 하며 무거운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열 걸음 정도 걸은 뒤에 멈춰 서서 방금 받은 쿠폰을 들여다보았다. 쿠폰에는 자동으로 인쇄되어있는 도장 한 개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 7개의 도장은 소급적용이 안 되는 거였나. 헛웃음이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이 카페에 오려고 저 망할 무거운 문을 열었다 닫으며 애썼던 나 자신이 가엽게 느껴졌다.
그토록 원했던 쿠폰을 받고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카페 안에 있을 때 보다 더. 정말 7개 스탬프 때문에 이런 걸까. 7개 이게 뭐라고! 카페 사장님 때문에 화가 난 것인가 아니면 고작 쿠폰 쪼가리 때문에 기분이 상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화가 난 것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명확히 낼 수 없었다. 그래도 명확해진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이 정도의 일로 기분이 상할 만큼 나는 굉장히 옹졸한 사람이었구나. 쿠폰을 반으로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