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5층짜리 주공아파트 2층에 위치한 우리 집. 현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5-6호 통로를 내려온다. 통로에서 좌측으로는 아파트 상가가 보이고 정면에서 살짝 우측에는 놀이터가 보인다. 아침 등교마다 그네 몇 번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얼른 학교 가서(더 정확하게는 학교 앞에 가서) 수업 시작 전에 놀거리를 생각하면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통로에서 나와 우측으로 쭈욱 걸어간다. 우리 집이 있는 동을 지나쳐 옆 동이 나타난다. 계속 걸어가다 옆 동 끝에 다다르면 우회전을 한다. 그러면 단지와 외부를 구분하는 철제 울타리가 보인다. 그 울타리 구석에 단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한 작은 쪽문이 있다. 언젠가 친구들과 놀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혼자 까불다가 그랬는지 문으로 돌아나가기 귀찮아서 울타리를 넘어 가려했다. 제 몸 크기는 생각 않고 무리하게 울타리를 넘다가 철제 울타리 끝 부분에 긁혀서 다리오금 부위에 손가락만 한 상처가 생겼다. 상처가 제법 깊어서 아무는 데까지 시간이 꾀 걸렸고 울퉁불퉁 흉터도 남았다. 그 후로는 다소 돌아가더라도 문을 찾아 넘어가려 한다.
쪽문을 지나 단지 밖으로 나오면 연립주택이라고 불리는 빌라 단지가 나온다. 빌라는 우리 아파트보다 2층이 낮은 3층짜리 건물이라는 것 외에는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단지 규모가 더 작고 단지를 구별하는 울타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빌라 단지에는 놀이터가 없다. 아버지는 시간 나실 때 종종 빌라 단지에 가신다. 빌라 어딘가에 사시는 어르신께서 대국 한 판 두자고 찾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빌라에 다녀오시면 난 항상 여쭤보았다.
''아빠, 이번에도 할아버지한테 바둑 이겼어?''
''응, 그럼.''
아버지는 항상 이겼다고 하셨다. 내가 커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왜 아버지께서 그렇게 대답하셨는지 살짝 이해가 되었다. 짧은 대답이 가장 덜 귀찮은 법이다. 빌라를 왼쪽에 두고 길을 따라 쭈욱 직진을 한다. 길의 우측에는 넓은 공터가 있다. 공터에는 공장 같기도 하고 창고 같기도 한 임시 건물이 몇 개 있다. 이 건물에는 물결무늬의 슬레이트 지붕이 길게 내려와 있었는데, 겨울눈이 오고 나면 그 지붕 끝에 고드름이 내 팔 길이만큼 자라 있어서 친구들과 종종 놀러 갔다. 길고 뾰쪽한 고드름을 끊어다가 아이스 바를 먹는 시늉을 하며 혀를 대기고 하고 친구들과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공터의 한편에는 버려진 화물 기차들이 검정 기름때와 붉은 녹에 뒤덮인 채로 버려져 있었다. 간혹 여기에서 놀기도 했다.
빌라 단지와 공터 사이 길로 계속 가다 보면 우회전하는 길이 나온다. 이쯤 되면 학교에 제법 가까워져 눈에 익은 친구들이 여럿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다 보면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머문다. 문구점과 잡화점의 애매한 경계에 있는 가게 몇 개가 좌우로 놓여있기 때문이다. 가게에서는 학용품, 실내화, 물체 주머니, 미술용품, 악기 등 학교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팔았다. 그리고 군것질 거리, 장난감, 액세서리 등 학교생활에 필요 없는 상당한 것들도 팔았다. 이에 더해 가게 앞에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각종 뽑기 게임이 있었다. 가장 저렴한 게임은 넓은 도화지에 반으로 접힌 작은 종이들이 스테이플러로 박혀있는 것인데, 50원 남짓을 내고 작은 종이를 두어 개 뜯어 그 안쪽에 적힌 등수대로 경품을 받는 것이었다. 1등을 하면 가격 좀 돼 보이는 장난감 총이나 자동차를 준다고 되어 있으나 매번 꼴등만 나와서 도대체가 저 1등을 뽑는 사람이 나오는지 늘 의문이었다. 매번 꼴등 경품으로 50원보다 훨씬 저렴해 보이는 땅콩 캐러멜 몇 개만 받곤 했다. 그다음은 100원짜리 동전을 납작한 홈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동그란 플라스틱 통을 토해내는 장난감 뽑기 게임이다. 장치 겉면에는 여기에 어떠한 장난감들이 들었는지 표시되어 있고 동그란 통에는 게 중 하나가 무작위로 들어있었다. 인기 있는 시리즈의 장난감이 있을 때는 모든 종류의 캐릭터를 모으려고 열심히 하기도 했고 주위 친구들과 교환하기도 했다. 잡화점 앞 게임기 중 최고봉은 역시 짱겜보 게임기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가위바위보를 하여 나오는 숫자만큼의 코인을 토해내는 사행성 게임기인데 가위바위보를 하는 순간에 짱겜보라는 소리가 나오기에 다들 짱겜보 게임기라 불렀다. 거기서 나오는 코인은 100원과 가치가 같아서 잡화점 내에서 돈처럼 쓸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짱겜보 게임을 다시 하느라 탕진하기 일쑤다. 잡화점을 지나면 조그마한 분식집이 있다. 떡볶이와 오뎅은 물론이요 토스트나 각종 튀김 등을 팔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식빵 튀김이었다. 달걀을 입힌 듯 노란색 튀김옷을 입은 토스트에 설탕을 가득 묻혀서 먹을 수 있었다. 그 분식집 아주머니는 늘 식빵을 대각선으로 잘라 삼각형 모양의 토스트를 팔았다.
학교 앞의 이 무시무시한 유혹들을 흠뻑 맛보고나서 드디어 교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뇌리에 남아 있는 특이한 기억은 이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정문이 아닌 쪽문이어서 매우 작았다는 것이고, 쪽문 바로 앞에는 작은 도랑이 지나고 있어서 쪽문으로 가려면 도랑만큼이나 작은 다리를 지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 그러했는지 사실 확인이 필요하겠으나 나의 등굣길 이미지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쪽문을 지나면 운동장이었고, 그 반대편에는 학교 건물이 있었다. 보통은 건물 안으로 곧장 들어갔지만, 가끔은 건물 뒤편을 들르곤 했다. 거기에는 특이하게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연못 중앙에는 더 작은 바위섬이 있었고 그 위에서 연못의 터줏대감 거북이가 일광욕을 즐기곤 했다. 거북이가 잘 있나 구경하러, 때론 잘 있는 거북이에게 자갈 하나 던지러 가는 재미가 있었다.
길고 납작한 나무 판재가 가로누운 복도를 지나 교실 앞에 서면 복도 앞 신발장에 신발을 놓는다. 그리고 복도와 똑같은 바닥을 가진 교실로 들어선다. 실내화는 꼭 신어야 한다. 나무 판재에서 종종 잔가시들이 튀어나와 양말을 뚫고 발을 찌르기 때문이다. 학기 초 선생님께서 지정해주신 내 자리에 앉아 가방을 비롯한 소지품을 내려놓는다. 등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