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 과거가 때로는 미래의 어떤 일들로 인해 기막힌 추억으로 탈바꿈되곤 한다.
정미를 만났다. 무려 7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와 몇 년간의 기억 공백 시기를 지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강원도 태백에 있었다. 내 기억의 가장 오래된 것들의 배경은 태백시 하고도 황지동이었다. 그 옛날 탄광 산업을 이끌었던 태백시는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주요 근린시설들은 황지동에 몰려있었다. 황지천을 감싸고 길쭉하게 생긴 황지동의 북쪽에는 태백역과 주요 상업 시설, 보건소 등이 있고, 가운데쯤이라고 하는 곳에는 낙동강의 발원지라 알려진 황지연못이 있다. 영남의 젖줄이자 한국전쟁 최후의 보류였던 낙동강의 발원지라 하니 어마어마할 것 같지만 2,000평 남짓한 작은 공원에 있는 자그마한 연못이다(면적 비교의 대명사 여의도와 비교하면 대략 1/500 수준). 그다지 크지 않은 연못 바닥에는 무수히 많은 동전들이 있다. 가운데 돌그릇에 동전을 넣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하여 너도 나도 던진 결과이다. 영남 사람들은 본인들이 마시는 물의 근원이 깊은 산 청정수가 아니고 사람들의 손때 묻은 동전 씻은 물이라는 걸 알까 모르겠다. 이렇게 자그마한 연못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낙동강을 이룬다 하니, 유독 이 동네 할아버지들은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여 설명하셨다. 머리가 크고 나서 생각해보니, 풍수지리 기반의 토속적인 신앙과 개신교 교리가 짬뽕을 이룬 이 비유가 웃겼고, 성경 속 해당 구절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와 달리 비아냥되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일일이 바로잡아도 좋겠지만 '똥이요~ 말해도, 금이요~ 알아들으면 장땡.'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세상에 없으실 분들께 따져 고칠 필요 없이 그저 이 짧은 글에서 대강 정정 시늉하고 넘어가련다.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면 동사무소, 시청 등 주요 시설들이 있고 황지동 남쪽 끝자락에 주공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 일대가 내 인생 첫 기억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곳이다. 우리 집은 5층 아파트의 2층에 있어 앞에 살짝 가린 단풍나무 위로 깨금발을 들어서 보면, 좌로는 단지 내 상가가 우로는 놀이터가 펼쳐져있었다. 우리 집이 있는 통로의 옆 혹은 옆 옆 통로 1층에는 나와 동년배 여자아이인 정미가 살고 있었다.
정미랑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동네에 애들이 넘쳐나는 시기였고 남자인 친구들 및 형, 동생들과 놀기에도 하루 이틀이 모자랐기 때문에 정미하고는 같이 놀며 친해질 일이 없었다. 부모님들께서는 근거리에 사는 주민이고 집안 첫째 나이가 같다는 공통점에 알고 지내시는 정도라고 기억한다. 그래서 사실 정미하고의 추억은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정미를 제외한 정미 가족들에 대해서 드문드문 작은 기억의 조각이 남아 있다. 정미에게는 남동생 정섭이가 있다. 정섭이랑은 종종 놀았다. 워낙에 이러쿵저러쿵 많이 놀아서 일일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지 분명히 자주 놀았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시절 그 환경이었다. 그런데 정섭이와의 일중에서 특별히 뇌리에 남는 것은 정섭이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기억이다. 그저 만화영화를 봤는지 게임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와 정섭이가 입 벌리고 한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 마치 영화 속 스틸컷처럼 남아있다. 하고 많은 장면 중에 그 장면이 유독 기억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 장면 살짝 옆에 계신 정미 어머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미 어머니는 당시에 내가 아는 어른들 중에서 가장 상냥하신 분이었다. 살면서 만나 뵌 여러 어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실 정도로 상냥하신 분이시다. 이렇게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정미 어머니를 떠오르면 상냥하게 웃으시며 내 이름을 부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잠깐 떠올려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어릴 때부터 천방지축이었던 나는 이런저런 말썽을 피워 엄마한테도 자주 혼났다. 밖에서 놀다가 사고 칠 때는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에게서도 잔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나에게 정미 어머니는 항상 상냥하게 미소 지어 주시는 분이셨다. 사실이냐 아니냐 따져 물으면 뭐라 증명할 순 없겠지만, 내 기억 속에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 정미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마치 자동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정미 어머니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랐고, 그 상냥하신 모습 그대로 정미 뒤에 서 계신 정미 어머니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미 아버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이셨던 같다. 우리 가족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을 올라갈 때 정선군 고한읍으로 이사를 갔고 그 후 춘천시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태백에서 살았던 시절 정미와 연결되는 기억은 이 정도뿐이다. 이런 밋밋한 기억들이 '추억'으로 탈바꿈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정미를 다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도내에서 모집하는 학교였다. 나는 춘천에서, 정미는 태백에서 이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아직 입학하기도 전인 1월, 학교에서는 사전연수라는 이름으로 입학 예정생들을 한 달간 학교에 생활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정미와 다시 만났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서히 조각나고 흩어지고 있던 정미네와의 기억들이 그 순간 정지하여 뇌리에 남아버린 느낌이었다. 별 볼일 없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작은 기억들이 다시 '기막힌 추억'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더 많은 기억들이 남아있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 옛날 태백에서 정미네와의 일들 중에 부모님께서 기억하시는 것들이 더 있지 않을까? 나중에 뵙게 되면 여쭤봐야겠다.
고등학교 3년 그리고 그 이후까지야 정미와 함께한 여러 추억들이 남아있다. 해당 추억의 장면들에는 정미만 있지 정미 가족들은 없다. 고등학교가 춘천도 태백도 아닌 지역에 있었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서로의 가족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딱 한 가지 정미와 정미 어머니가 함께 기억나는 추억이 있어 여기에 마저 남겨보고자 한다.
고교 졸업을 하고 1년 반이 지난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몇몇 고등학교 동기 들과 때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강원도를 누비고 다녔다. 영월에서 동기 몇 명이 모였고 다음에 뭐할지 생각하는 와중에 정미가 방학 차 태백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다른 고민 없이 정미를 만나러 태백을 갔다. KTX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가는 기차를 타고 갔지만 정신없이 떠들면서 가다 보니 고속철도를 타고 간 것처럼 짧은 여정이었다. 늦은 오후 태백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역사에 내려서도 떠들고 있는 우리 입에서는 입김이 나왔다. 나로서는 어린 시절 이사 간 이후로 처음 방문한 태백이었지만, 그 입김 하나로 많은 기억들이 피부로 스며들어와 행복했다. 다 같이 정미를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례한 짓이다. 소 때 같은 놈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치니 정미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이 마음을 다 크고 내 가정을 이룬 뒤 누군갈 초대할 때 되니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미 어머니께서는 예의 그 상냥함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밤새도록 따뜻한 곳에서 옛날 얘기와 각종 게임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로 뒤엉킨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추억에서도 한 참 멀어진 시기에 와 있다. 그 사이 정미는 가정을 이뤄 멀리 해외에서 살고 있다. 아주 가끔 소식을 듣고, 그 보다 더 가끔 안부를 묻고 있다. 누구보다 긴 세월의 인연을 함께하는 친구 정미여 늘 건강하길.
사진: Unsplash의abigail 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