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종종 하시던 말씀이다. 가끔 외식할 때면 식당 주인께서 주문을 다시 확인할 정도로 나랑 내 동생은 잘 먹었다. 초등학교 때 일반 성인이 먹는 만큼 먹었고 중학교 이후부턴 2인분 이상이 기본이었다. 둘 다 워낙에 활동적이라 따로 체중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은 참 다행이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활동하니까 많이 먹지 않았나 싶다. 두 똥강아지들 식비 감당하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께 박수 한 번, 짝! 아버지께서는 매우 검소한 분이셨다. 생활 전반에서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잘 소비하지 않으셨다. 간혹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필요한 것'에 대한 기준이 달라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는 보수적 입장이셨고 형제들은 어머니 편이었다. 그 와중에 '책'은 부모님께서 항상 구매를 주저하지 않으신 '필요한 것'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나 책방에서 책을 빌릴 때나 항상 제한이 없으셨다. 간혹 읽다 말고 구석에 처박아 놓은 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타박하지 않으셨다. 부모님께서는 실컷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만큼이나 책 사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책 읽는 것을 장려하셨다. 그렇게 집에 늘 책이 있으니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때는 밤에 불을 끄고 자는 게 무서웠다. 불 끄기가 싫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읽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드는 게 습관이었다. 그 당시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 김창웅, 무당미디어]라는 책에 푹 빠져있었다. 최고의 무대에 서기까지 박찬호 선수가 겪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매우 재밌었다. 다시 읽어도 재밌어서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치열한 경쟁과 차별적 대우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어느 날 앞집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친구 방 책장에는 여러 세계 문학 소설이 있었다. '와, 이 녀석은 이 책들을 다 읽는단 말이야?' 난 그 친구가 평소에 그 책들을 다 읽는다고 오해했다. 질투와 오기가 발동하여 무심코 한 권을 집어 빌려달라고 했다. '네가 읽는 책, 어디 나도 한 번 읽어보자.' 아주 보잘것없고 유치한 동기와 함께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읽게 되었다. 두꺼운 소설을 완독 하기란 쉽지 않았다. 소설의 재미보다는 다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읽었다. 오해로 인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읽었다. 허무했다. '이건 뭐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운이 좋게 청새치를 낚았는데, 배 옆에 매달고 오다가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결국 뼈만 남았다는 얘기잖아.' 오기로 읽은 결과 세계적 명작을 한낱 실패한 낚시꾼 이야기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약간의 호기심이 남아서 다시 읽어보았다. 명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소설 속의 상황이 머리로 그려져서 재밌었다. 캄캄한 바다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할아버지, 매달린 청새치를 공격하면서 뜯어먹는 상어들, 뼈만 남아 앙상해진 청새치, 노인을 위로하는 소년 등 그때 읽으면서 그렸던 장면들이 아직도 어렴풋이 생각이나, 마치 내가 겪은 추억인 양 기억에 남아있다.
고교 시절 자습 시간에 공부하기 싫을 때면 책을 읽었다. 친구들이랑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을 돌려보다가 선생님께 압수당하곤 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 응당 바른 자세이나,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의 나는 고전문학책을 꺼내어 읽었다. '너 이 녀석 또 판타지 소설 읽는 거야?' 감독 선생님이 다시 와서 검열을 시도할 때, 난 당당히 국어 공부를 위함임을 어필했다. 무자비한 검열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고나 할까. 철부지 똥고집으로 꺼내긴 했지만, 손에 쥔 김에 읽었다. 읽어 보니 나름 재밌었다. 잘 모르는 용어나 생경한 표현이 많아서 읽기 힘들었지만, 이야기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책 말고도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았던 시기였다. 결혼하고 취직을 한 이후, 젊었을 때 즐기던 것들이 다 시시해졌다. 그러면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외 명작 소설을 주로 읽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소설이 가장 읽기 수월했다. 가상의 인물과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삶을 발견하고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명확하게 삶의 지침을 알려주는 인문 서적보다 소설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두루뭉술하다. 그러나 안개 같은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곱씹다 보면 그 안에 숨겨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메시지들은 머리와 가슴에 함께 남아서 좋았다.
대학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가까이에 매우 훌륭한 도서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열람실에서 공부하기 위해 방문하는 학생들 틈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드나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장서가 있어서 좋았다. 없는 책을 신청하면 구입해 줘서 더 좋았다. 가끔 아무도 읽지 않은 새 책을 발견하여 읽을 때면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책 읽는 게 좋아졌다. 아니, 그건 좀 과장됐다. 그저 책 읽는 게 좀 더 익숙해졌다. 책을 읽다 보니 단순히 책 속의 재미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서서 책과 관련한 몇 가지 희망 사항들이 생겼다. 첫 번째는 도서관장이 되는 것이다. 책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어졌다. 잘할 수 있을지,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책과 함께 숨 쉬며 일하는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두 번째는 출판사 만드는 일이다. 특이하게도 출판사는 다른 ‘업’들과는 다르게 사무공간 없이 일반 가정집 같은 데서도 사업등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상업'과 '문화'의 경계에 있어서 그런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러한 신비로움에 끌렸다. 세 번째는 출판사와 더불어 책방을 꾸미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을 팔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책에 대한 삶과 이야기가 쌓이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졌다. 모르겠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역시나 '책을 쓰는 것'. 책을 읽다 보니 '나도 책을 써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근데 또 소설을 계속 더 읽다 보니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좋은 책들을 접할수록 나 자신이 작아지면서, 책을 쓴다는 것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훌륭한 명작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도저히 이렇게 깊고 깊은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순 없어.'라며 자신 없어졌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조급하진 않다.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목표가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삶의 긴 호흡 속에서 하나씩 도전하고 이뤄가고 싶다. 내 삶의 책이 덮이는 그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