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딘지 모를 높은 곳에서 시작한다. 좌우는 어두컴컴한 숲으로 둘리어 있다. 발아래로는 시커먼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 저 멀리 아득하게 흘러간다. 그 순간 나는 그 검은 물줄기 위에 안착한다. 여긴 어디지? 댐이다. 방류가 시작되는 댐의 가장 높은 곳이다. 도대체 왜, 어떻게, 어떤 연유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줄기와 함께 곤두박질친다. 마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조금 진정하고 보니 숨을 쉬고 있다. 몸의 절반만 수면 아래 잠긴 채로 흐름과 함께 미끄러지고 있다. 이내 자세를 고쳐 본다.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편다. 파도를 타듯이 물줄기와 하나가 되어 나아간다. 검은 숲에서 뿜어지는 공기들이 나를 멈추고자 맞바람으로 저항한다. 소득 없는 저항일 뿐 긴장한 땀줄기를 식히고 스쳐 지나간다.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물줄기가 저만치 앞에서 끊어져 있고 전방에는 새하얀 하늘만이 펼쳐져 있다. 이번에도 무언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생각의 물꼬를 트려는 순간을 훼방하려는 듯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일어서서 미끄러진다. 몇 번의 추락과 항해가 반복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으나 추락할 때의 등골 오싹한 공포는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공포가 내적 하여 장애가 되기 전에 항해의 시원함이 모든 것을 초기화한다. 이전의 곤두박질보다 더 극심한 추락이 이어진다. 이번엔 좀처럼 일어설 수도, 미끄러질 수도 없다. 오히려 조금씩 아래로 잠기는 듯하다. 숨이 막힌다. 극심한 복통이 밀려온다. 소리치고 발버둥을 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진다. 여전히 수면에 잠긴 양 베개가 축축하다. 엎드려 누운 탓에 호흡이 가빠온다. 아랫배 통증도 여전하다. 정신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화장실로 뛰어간다. 배뇨와 동시에 현실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여기는 또 어딘가. 온 사방이 폐허로 변해있다. 도로는 온갖 요철로 어지럽고 건물들은 성한 곳이 없다. 잿빛 하늘에 연기마저 자욱하다. 느닷없이 날카로운 긴장감이 밀려온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적들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시각, 청각, 후각은 마비된 지 오래다. 적들이 뿜어 밀어내는 탁한 공기가 내 피부를 스친다. 그 음산한 촉각이 내게 경고한다. ‘도망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달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에 들어선다. 어지러이 헤매다 발견한 계단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쉼 없이 올라간다. 오르면 오를수록 그들의 공포스런 공기가 더 가까워진다. 눅눅하고 흐느적거리는 공기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더 큰 공포는 저 앞에 있다. 좌우로 피할 곳이 없다. 저만치 계단의 끝이 다가올 듯 오지 않는다. 달리고 있지만 달리지 않는다. 내 다리는 뛰고 있는가. 내 팔은 휘젓고 있는가. 내 심장은 요동치고 있는가. 그저 의식만 남아서 뛰고, 휘젓고, 요동치며 공포에 휩싸인다. 앞뒤로 맞부딪히는 공포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적들의 음침한 공기가 실체가 되어 내 발목을 붙잡으려는 그 순간 눈앞이 열리고 빛이 번진다. 계단의 저 끝 옥상으로 도달했다. 다음 전략을 모색할 틈도 없이 난간 아래로 추락한다. 계단을 오를 때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떨어진다. 미약한 비명도 허락되지 않은 채 추락의 공포를 온전히 흡수한다. 뒤쫓던 적들이 저만치 아래에서 똬리를 틀고 엎드려있다. 그 안에 더 깊은 공포의 심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려는 그 순간 눈이 번쩍 뜬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동시에 상체를 일으킨다. 추락의 고통이 아랫배에 몰려온다. 뛴다. 방출한다. 그리고 안도한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을 자꾸 꾸는 걸 보니 키 크려나 보다.’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씀하신다. 오히려 더 좋은 거란다. 정말 키가 컸는가 대충 정수리 위로 손을 대 가늠해본다. 별일 없는 평안한 하루가 그냥저냥 흘러간다.
머리가 크고 철이 들고나니 꿈을 거의 꾸질 않는다. 이젠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추락한다. 목표가 좌절되어 침울하다. 하고픈 일은 할 수 없고, 해야만 하는 일에 지쳐 무너진다. 외면할 수 없는 온갖 현실이 나를 붙들어 맨다. 때로는 순항하고 있다가도 예고 없이 다가오는 과제들이 나를 작아지게 한다.
그래도 살아간다. 아니 살아낸다. 매일 반복되는 낙몽(落夢)도 돌이켜보면 항상 시작은 맨 꼭대기였다. 떨어지고 떨어져도 어느 순간엔 다시 올라가 있었다. 삶도 그렇다. 끊임없이 추락하다가도 눈 똑바로 뜨고 보면 다시 올라간다. 나는 비록 무너져도 가족, 친구, 선생님 등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과 함께 같이 올라간다. 생각지도 못한 높은 곳에 서기도 한다. 어지러이 반복되는 삶의 파고 속에서 몸과 마음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