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란 늘 상대적이지 않을까?
스마트폰과 IoT 등이 보편화된 환경에서 태어난 지금의 아이들에겐 이것들은 그저 날 때부터 함께해 온 일상일 뿐 앞선 문명이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한창 연구,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 머신러닝 등이 곧 일상화되면 새로운 문명이 다가왔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문명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등일 것이다. 그럼, 나에게 다가온 첫 문명은 무엇이었을까? 단언컨대, 컴퓨터와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께서 그 이름도 유명한 ‘세종대왕’ 컴퓨터를 사주셨다. 이름에 걸맞게 아주 크고 웅장한 장치였다.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컴퓨터는 내 방에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대왕님은 나의 멋진 친구가 되었다.
문명의 이기 활용 1. 가장 먼저 익힌 기능은 문서 작업이었다. 더듬더듬 키보드를 눌러 글씨를 만들고 만들어진 글씨가 합쳐서 하나의 문서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 못난 글씨를 숨길 수 있어서 좋았다. 가정 수업 선생님께서 다음 요리 실습을 위한 레시피를 정리해 오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종대왕님의 힘을 빌렸다. 상단에 제목을 쓰고 그 아래 내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번호에 맞춰 요리 순서를 정리했다. 뭔가 아쉬워서 테두리를 구불구불 화려하게 장식했다. 클립보드에서 일부 이미지도 삽입했다. 선생님께서 굉장히 칭찬해 주신 기억이 난다.
문명의 이기 활용 2. 너무도 자연스럽게 게임을 했다. 친구들로부터 불법으로 복사해 온 게임을 즐겼다. DOS 기반의 멋없는 게임이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행히 중독되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다.
문명의 이기 활용 3. 언젠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께서 약주를 걸치고 들어오시면서 CD 뭉텅이를 툭 던져주셨다. 겉에는 ‘ㅇㅇ세계대백과‘라 쓰여 있었다. 근데 뭔가 좀 허접해 보였다. 싼값에 불법복제물을 사 오신 듯했다. 그래도 내용물은 충실했다. 책장의 두꺼운 백과사전은 그렇게 짝퉁 백과사전에 밀려 퇴물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 활용 4. 세종대왕님은 방구석의 나를 부모님 몰래 저 먼 세상으로 보내주셨다. 당시 전화선으로 컴퓨터를 전화 포트에 연결하면 PC통신이 가능했다. 다만, 나는 아이디가 없어서 친구 정수의 것을 빌려 썼다. 사용한 시간만큼의 비용을 용돈에서 빼서 정수에게 줬다. 이런저런 게시판에서 재밌는 글과 사진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익명의 누군가와 오랜 시간 채팅을 하기도 했다. 용돈의 대부분을 PC 통신으로 탕진할 무렵, 부모님께서 나의 통신 여행을 알아차리셨다. 집으로 들어오는 전화 회선은 하나이기에 내가 PC 통신에 접속하면 우리 집 전화는 먹통이 되었다. 엄마가 지인으로부터 그 집은 왜 밤만 되면 계속 통화 중이냐는 얘기를 들으시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세종대왕님을 내 방에서 뺏길 대위기를 맞이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과 함께 대왕님과의 동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문명의 이기 활용 5. PC 통신이 단절되어 시무룩한 어느 날, 친구 정수가 귀한 소식을 물고 왔다. 근처 도서관의 컴퓨터실에는 랜(LAN)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인터넷이 매우 빠르다고 하였다. 뭐가 설치되고 뭐가 빠른지는 모르겠지만 PC 통신을 대체할 무언가가 있다는 말에 그 즉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서관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맞이했다. 그리고 PC 통신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동영상 시청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인기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잔뜩 찾아보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컴퓨터에 밝은 정수 덕분에 해당 뮤직비디오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고 가져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파일들을 차곡차곡 담을 수 있었다. ‘세종대왕님 기다리세요. 제가 최신 뮤직비디오들을 잔뜩 들고 가겠습니다!’ 그날 밤 세종대왕님을 알현하여 플로피 디스크를 진상하였다. ‘전하, 천하의 뮤직비디오를 모조리 담아 왔습니다.’, ‘어디 시현해 보거라!’ 그러나 도서관에서는 잘도 재생되던 뮤직비디오가 집에서는 먹통이었다. 아무리 세게 클릭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알고 봤더니 내가 받은 것은 뮤직비디오로 접근하는 html 링크 주소 파일이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우리 세종대왕님께는 무용지물이었다. ‘여봐라. 저놈이 나를 능멸하였도다.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대왕님 대신 노여움에 가득한 나의 오른손은 괘씸한 플로피 디스크를 내동댕이쳐 능지처참하였다.
이제는 새로운 문명에 밀려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그저 그런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나의 어린 시절 문명들이여 영면하소서!
사진: Unsplash의Marcel Ardiv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