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먼 훗날에도 나는 달리고 있을까? 무얼 하며 달릴까? 계속 달려야 할 텐데 말이다.
40대를 코앞에 둔 지금의 나는 20년 한 참 어린 친구들과 달리고 있다. 이곳으로 온 지 약 4년여 동안은 정신없이 지내느라 달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최근 예기치 못한 상황과 인연이 겹쳐 대학 동아리 학생들 틈에 끼여 농구를 하게 되었다. 젊고 팔팔한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했다. 적당히 상황 봐서 낄 자리가 아니면 빠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대학 다닐 때 한 참 열심히 했던 덕분인지 얼추 1인분은 할 수 있었다. 물론 체력이 많이 딸려서 그들처럼,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몇 시간씩 오래 하긴 힘들었다. 적당히 조절하며 어울렸다. 가입비라는 핑계로 동아리 부원들끼리 밥 사 먹으라고 얼마쯤 쥐여줬다. 그래서 그런가 계속 같이하자는 권유에 반년 넘게 하고 있다. 비슷하게 반복되어 지루해지는 일들과 성가시게 하는 여러 현황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던 요즘의 매우 큰 활력소라 할 수 있다.
30대의 나는 거의 달리지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드러눕기 바빴다. 하루하루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달려도 금방 숨이 찼다. 심지어 디스크라는 질병도 얻었다. 그 기간이 대략 5~6년여 되었다. 그러다 교회에서 알게 된 몇몇 형님들과 소소하게 농구 소모임을 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 농구 좀 했다는 내 얘기를 듣고 어디 얼마나 하는지 한번 해보자며 시작되었고 그 모임이 1년여 동안 이어진 것이다. 다들 젊었을 때의 날고 기던 추억을 안고서 달렸지만, 하나둘 고장 나기 시작한 몸은 심히 삐걱거렸다. 그래도 즐거웠다. 누가 보기에는 그저 흐느적거리는 몸짓에 가까웠을 거다. 그러나 내 몸은 달렸다. 그리고 마음은 날았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직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나의 달리기는 다시 멈춰졌다.
20대의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심심하고 할 일 없으면 운동을 했다. 학업을 비롯한 여러 일들로 힘들고 지칠 때도 체육관을 찾았다. 쉬지 않고 달리면서 나는 건강해졌다. 근육이 붙고 체력이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동안 정신과 마음이 정화되었다. 일상으로 피폐해진 내면을 비워주고 씻어주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시합을 통해 상대와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팀 안에선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렸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순간에 빛나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신께서 내게 주신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늘 운동하길 좋아했다. 아니 그보단 몸을 쓰는 모든 짓거리들을 다 좋아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시골에서의 그 활발한 활동력이 도시로 왔다고 어디 가질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다. 체육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서 교내 육상부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 시골에서 단련된 나의 파닥거림이 선생님에겐 좋게 보였나 보다. 소심한 성격 탓에 선생님의 권유를 거절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뭔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았고 다른 녀석들보다 내가 돋보일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그 자리에서 덜컥하겠다고 답했다. 그날 방과 후에 바로 육상부 활동을 시작했다. 체육 선생님이 주신 흐늘거리는 운동복을 입었다. 같이 들어온 몇몇들과 체조를 하고 운동장을 달렸다. 선생님께서 나에게는 높이뛰기가 주 종목이라고 하셨다. 뭔지도 모르고 가로 놓인 막대를 계속 넘었다. 하교하는 친구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 멋지다!’ 어깨를 으쓱했다. 훈련을 마치고 느지막이 집에 갔다. 엄마가 노발대발하셨다. 당장 내일 학교에 가면 육상부 안 한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이런저런 이유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난다. 대략 예체능부 같은 거 눈독을 들이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 신 듯하다. 내가 또 엄마 말 잘 듣기로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착한 장남 아니겠는가. 다음날 학교에 가서 체육 선생님께 육상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내가 보내주셨다. 그렇게 육상부 생활 1일 천하를 마무리했다.
달렸다. 달린다. 계속 달릴 거다.